혼자 여행인데 외롭지 않았던 이유 — 런던 호스텔 당구장부터 리스본 10유로 디너까지, 친구가 생기는 순간들
2023년 유럽 35일, 2025년 포르투갈·스페인 15일. 둘 다 혼자 갔다. 그런데 2025년 여행 정리 글에 내가 붙인 제목은 “혼자여도 외롭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돌아보니 정말 혼자였던 날이 오히려 드물고, 그 대부분은 호스텔에서 시작됐다. 친구가 생긴 순간들을 모으고, 실제로 통했던 것만 남긴다.
런던 Wombat’s — 첫 친구는 코골이 형과 당구에서
첫 호스텔은 런던 Wombat’s, 8인 혼성방이었다. 첫날 밤은 지하철 소리와 아랫칸 형의 코골이로 거의 못 잤고, 둘째 날은 시차 때문에 뮤지컬 1부만 보고 나와 그대로 뻗었다. 친구는커녕 생존이 문제였다.
셋째 날 아침, 그 코골이 형이 나가려다 내 일정을 물었다. “스케줄 없다"고 했더니 The Shard가 예약 없이 갈 수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해 줬고, 그날 동선이 그 형 덕에 정해졌다. 저녁에 돌아오니 호주에서 온 타라가 방에 있었다. 오늘 어디 다녀왔는지 얘기하다가 “나 내일 일정 없는데 같이 가도 돼?” 하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그날 밤 타라, 싱가포르의 엘레나, 오스트리아의 파비안과 지하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포켓볼을 쳤다. 당구 세대인 내가 이겼다. Korean Winner.
다음 날 아침에는 타라·엘레나와 장을 봐서 호스텔 주방에서 아침을 해 먹었다. 한국 사람인 나에게는 없던 개념이었다. 오전에는 각자(나는 노팅힐), 오후에 캠든 마켓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연락해 합류했다. 혼자 다니다 같이 다니니 하늘부터 달라 보였다. 런던을 떠나는 새벽엔 파비안과 택시를 같이 타고 킹스크로스까지 갔다. (런던 Day 3)

파리 — “먹을 사람 없으면 같이 가줄까?”
파리에서는 TGV 취소로 저녁 약속을 깨고 일찍 숙소에 돌아온 날, 새 룸메이트 캐서린(호주)이 들어왔다. 호스텔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니 밥을 먹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나도 안 먹은 참이라 “먹을 사람 없으면 내가 같이 가줄까?” 했다. 밤 10시에 나가서 음식과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센느강에 앉았다. 파리 사람들이 다들 나와서 노래 부르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관광지보다 그쪽이 파리다웠다.
베네치아 — 비행기 줄에서 네이버 웹툰을 보던 사람
브로츠와프에서 라이언에어를 타려고 줄을 섰는데 앞사람이 네이버 웹툰을 보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한국 사람? 말을 걸었다. 베네치아에서 밤 11시 기차로 로마 가는 분이라 5시간 동행이 됐다. 리알토 다리, 카페 플로리안, 2.5유로 피자. “똥손"이라면서 잘 나올 때까지 사진을 찍어 주셨다.
반대 사례도 있었다. 본섬 숙소 룸메이트 나디아(독일)는 인사도 대화도 받아 주지만 같이 밥 먹거나 야경 보러 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 날 뭐 할 건지는 꼭 물어보고 산마르코 성당 가는 법도 알려 주는 사람.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 모두와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여기서 배웠다. 마지막 날은 여행 커뮤니티에서 만난 두 분과 곤도라를 타고 성당 계단에서 맥주를 마셨다.
리스본 — 10유로 디너를 신청하고 소파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2025년 리스본, 일정 없는 자유일이었다. 문득 호스텔 저녁을 먹어 봐야겠다 싶었다. 10유로, 무한 리필. 6시부터인 줄 알고 내려갔더니 6시는 신청 마감이고 식사는 8시부터였다. 그래서 2시간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말을 걸었다. 보스니아에서 온 마케터(링크드인 친구가 됐다), 앙카라에서 온 친구(내가 터키에서 환전 사기 당한 얘기를 했더니 “내가 미안하다"고 했다), 마닐라에서 무계획으로 온 여자, 영국 부엌 디자이너(인스타 맞팔). 하루에 네 나라 친구가 생겼다.
8시에 밥이 나오자 둥근 테이블에서 누군가 “자기소개 시간 갖자"고 했다. 이름과 나라만 빨리 말하고 빠져나왔다. 한 그릇 더 먹으려고 따로 앉았더니 영국 친구가 바로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여행 다니다 보면 호주 애들과 영국 애들이 확실히 적극적이다. (리스본 자유일)

알함브라 — “같이 사진 찍어줄까요?”
그라나다 나스르 궁. 50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기차에 두고 내린 날이었다. 사진 찍어 줄 사람이 없어 여기저기 부탁하고 다니다가 중정에서 혼자 온 한국분을 만났다. “같이 사진 찍어줄까요?” 한마디로 동행이 시작됐다. 스페인 한 달 살기 중이신 분이었고, “우리 표로 알카사바도 볼 수 있어요"라는 정보도 그분 덕에 알았다. 저녁은 혼자라면 대충 때웠을 텐데 둘이라 이베리코와 해물 볶음밥을 제대로 시켰고, 산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달빛 아래 알함브라를 봤다.
2025년 정리 글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 사람은 길 가다 만나도 같이 다닐 만한데, 해외 친구들은 인사만 하고 끝나는 정도라 숙소라도 같아야 같이 다니게 된다고.
그리고 실패 — 세비야의 삼겹살 여섯 점
세비야 마지막 날 ALDI에서 삼겹살을 사 와 호스텔 주방에서 구웠다. 후추가 없어서 주방에 있던 애들이 준 향신료를 뿌렸는데, 그들은 “맵다 조심해” 했고 한국인에겐 전혀 안 매웠다. 여섯 점이 많아서 주방의 일곱 명에게 먹을 거냐고 물었다. 전원 “괜찮아”. 삼겹살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다 먹었다. 음식은 호스텔 디너처럼 “같이 앉는 구조"가 있을 때 통했고, 내가 구운 걸 권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실제로 통했던 것
호스텔 고르는 기준. 공용 공간이 있는 곳. Wombat’s는 지하에 바·당구대·탁구대·세탁기가 한 층에 있어서 저녁에 자연스럽게 모였다. 로마 더 옐로우는 체크인 때 오후 5시~7시 30분 무료 맥주 쿠폰을 줬다. 리스본 호스텔은 10유로 디너, 세비야 호스텔은 8시 무료 저녁이 있었다. 이런 “정해진 시간에 모이는 장치"가 있는 호스텔에서 친구가 생겼고, 없는 곳에서는 룸메이트 운에 맡겨야 했다. 8인 혼성방은 잠을 포기하는 대신 사람을 얻는 거래다.
말을 건 계기 — 전부 한 문장이었다. “나 내일 일정 없는데 같이 가도 돼?"(런던), “먹을 사람 없으면 내가 같이 가줄까?"(파리), “같이 사진 찍어줄까요?"(알함브라). 그리고 줄에서 본 네이버 웹툰 화면, 유랑과 카톡방의 “저녁 같이 드실 분”(체르마트·베네치아). 거창한 자기소개는 한 번도 효과가 없었고, 상대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사진·저녁·일정)에 붙는 한마디는 거의 매번 통했다.
혼자 있을 때의 자세. 리스본에서 배운 건, 디너를 신청해 놓고 공용 소파에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절반은 된다는 것. 방 안에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한국인 동행의 가치는 사진. 혼자 다니면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우물쭈물하다 외국 친구들 뒤에 줄을 선다. 파리에서 한국 동행과 다닌 날 깨달았고, 로마 마지막 날 판테온 인생샷도 동행 두 분 덕이었다.
혼자 가는 여행을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호스텔 공용 공간에 저녁 8시쯤 내려가 앉아 있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내 경우 거의 매번 거기서 시작됐다.
이 글은 제 여행 기록과 작업 로그를 바탕으로 초안을 AI와 함께 정리하고, 직접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