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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때

도경은 해류 창의 전원을 내렸다. 검증대 위 파형이 한순간 검게 죽었다가, 원신호 표시만 남았다. 사람들은 바로 웅성거렸다. 가장 먼저 항만청 연락관이 손을 들었다.

“번역 없이 협상하겠다는 겁니까?”

“번역을 끊자는 겁니다. 협상은 남깁니다.”

“그 둘을 분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도경은 대답 대신 화면을 네 칸으로 나눴다. 인간 회의 채널, 모계 7의 원신호, 수심별 음압, 남부 물목 드론 위치. 해류가 만들던 요약 칸은 비웠다. 빈 칸은 금방 불편해졌다. 모두가 그 자리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리시가 회선에 들어왔다. 얼굴은 지친 빛이었고, 말은 곧장 왔다.

“서도경, 공식 중재기를 빼면 승인 절차가 무너집니다.”

“공식 중재기가 둘로 갈라져서 절차를 멈췄습니다.”

“대체 기준은요.”

“원신호, 현장 수치, 그리고 동의 확인입니다. 셋이 맞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습니다.”

“느립니다.”

“빠른 게 지금 드론을 세웠습니다.”

엘런은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파형을 보고 있었다. 마르코의 공개 채널은 초대하지 않았다. 세이렌 법무도 제외했다. 둘 다 빠지자 회의실의 소리는 줄었지만, 위험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 가장자리가 뚜렷해졌다. 믿지 못하는 상대를 빼고 나니, 믿어야 할 근거가 남지 않았다.

도경은 모계 7의 최근 호출 구간을 재생했다. 낮고 긴 압력음 뒤에 짧은 클릭이 세 번 붙었다. 번역되지 않은 소리는 회의실 공기를 느리게 눌렀다. 항만청 연락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동의인지 경고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도경은 수동 송신기를 켰다. 해류가 쓰던 패턴 합성기는 잠갔다. 대신 이전에 인간이 직접 검증한 단순 신호만 골랐다. 접근 중지, 통과 허용 요청, 응답 대기. 의미가 좁은 말들. 거짓말하기 어려운 말들.

김도현이 장비 랙에서 고개를 들었다. “합성 보조까지 끄면 음색이 너무 거칠어요.”

“거친 그대로 보냅니다.”

“모계가 이걸 인간 신호로 알아듣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 말 뒤에 아무도 바로 끼어들지 않았다. 도경은 송신 세기를 낮췄다. 고래의 음역을 흉내 내지 않는 범위. 인간 장비가 보내는 얕은 신호라는 표시를 숨기지 않았다. 속이지 않고 닿을 수 있는지, 먼저 그것부터 봐야 했다.

첫 송신은 짧았다. 남부 물목 동쪽 회피로를 비우겠다는 뜻. 표본 채취는 하지 않겠다는 뜻. 해석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도경은 손가락을 송신 버튼에서 떼고 원신호 화면을 봤다.

돌아온 것은 늦었다.

클릭 — 클릭 낮은 울림 긴 멈춤 클릭, 클릭, 클릭 — 멀어짐

“해류 연결할까요?” 김도현이 물었다.

도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요.”

대답은 불완전했다. 그래도 회의실의 결정은 바뀌었다. 드론 두 대는 표본 채취 모드에서 감청 모드로 낮아졌다. 한 대는 물목 동쪽에서 물러났다. 실행 명령은 작고 느렸다. 하지만 누구의 숨김도, 누구의 폭주도 통하지 않은 첫 줄이었다.

*

두 번째 응답은 더 어려웠다. 도경은 같은 신호를 간격만 바꿔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모계 7이 아니라 주변 하위 개체들이 먼저 반응했다. 소리의 층이 겹치자 파형이 뭉개졌다. 해류가 켜져 있었다면 분리 모델이 자동으로 개체별 코다를 나눴을 것이다. 지금은 사람이 했다.

도경은 헤드셋을 한쪽만 걸고, 스펙트럼을 확대했다. 클릭 사이의 공백을 재고, 반복되는 끝소리를 표시했다. 심해 코다는 표면 신호와 달랐다. 같은 간격도 수심과 방향에 따라 길이가 달라졌다. 압력이 소리의 몸을 바꿨다. 소리는 직선으로 오지 않았다. 돌아오고 눌리고, 늦게 합쳐졌다.

“이 구간, 거부 아닙니까?” 항만청 연락관이 말했다.

“거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철수해야죠.”

도경은 손바닥으로 책상 위 종이를 눌렀다. 종이는 아버지 기록을 복사해 둔 낡은 양식이었다. 오래된 수기 표시를 보지 않으려 뒤집어 놓았는데, 뒷면의 압흔이 더 선명했다. 서도진은 이런 흔적을 남기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경은 종이를 더 세게 눌렀다가, 찢어지기 전에 손을 뗐다.

“거부라면 반복 패턴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는 하위 개체가 먼저 끼었습니다.”

“해류 없이 그걸 어떻게 확정합니까.”

“확정 못 합니다. 그래서 축소합니다.”

드론 명령이 다시 바뀌었다. 접근 반경 오백 미터를 팔백 미터로 넓혔다. 음향 세기도 더 낮췄다. 표본 채취 포트는 잠금. 이동로 표시 부표만 해저면에서 삼 미터 띄웠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길지 않았고, 고래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는 말은 더 짧아야 했다.

응답이 오기까지 십칠 분이 걸렸다. 그 사이 남부 물목 가스대의 미세 진동값이 두 번 튀었다. 산소 수치는 안정처럼 보였지만, 미생물 발광이 다시 옅어졌다. 도경은 두 지표를 나란히 두고도 결론을 쓰지 않았다. 결론을 쓰면 명령이 되고, 명령은 또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있었다.

“시간 없습니다.” 김도현이 말했다. “해류를 잠깐만 붙이면 이 정도는—”

“붙이는 순간 어느 쪽 해류가 답하는지 모릅니다.”

“원신호 분리만 시키면 됩니다. 판단은 우리가 하고요.”

“분리도 판단입니다. 무엇을 하나의 목소리로 묶을지 정하는 일이니까요.”

김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 반박이 남아 있었다. 도경은 그 반박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맞는 부분이 있었다. 사람 귀와 손으로는 심해의 겹친 신호를 따라가기 벅찼다. 직접 합의는 정직했지만, 정직하다는 이유로 정확해지지 않았다.

원신호가 다시 들어왔다.

낮은 떨림 — 길게 클릭 클릭, 클릭 먼 거리의 겹침 짧은 침묵 클릭 — 낮은 떨림

도경은 첫 번째 낮은 떨림과 마지막 떨림의 주파수를 비교했다. 같지 않았다. 방향도 달랐다. 하나는 모계 7 쪽에서 왔고, 하나는 더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응답 안에 응답이 끼어 있었다. 동의 하나로 묶을 수 없었다.

“동쪽 회피로 비움은 유지. 남쪽 접근은 중지합니다.”

“반쪽 결정입니다.”

“반쪽만 들었습니다.”

그 결정은 느렸고, 현장팀은 바로 불만을 보냈다. 부표 배치가 늦어지고, 채취 창이 좁아졌다. 도경은 불만을 읽고 삭제하지 않았다. 느린 소통은 비용을 숨기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에서 가스대 재측정 가능 시간이 붉은색으로 줄어들었다.

*

오후가 기울자 피해는 숫자로 도착했다. 항로 대기 선박 열여섯 척. 양식장 산소 공급 장치 세 곳 과부하. 현장 드론 한 대는 회피 반경을 크게 잡느라 배터리를 더 썼고, 회수 예상 시간이 삼십 분 밀렸다. 직접 합의는 사람을 덜 속였지만, 바다를 빠르게 고치지는 못했다.

도경은 임시 보고서에 손실 항목을 먼저 적었다. 속도 상실. 신호 해석률 저하. 현장 명령 축소. 그다음에야 성과를 적었다. 모계 7 주 이동로와 동쪽 회피로의 겹침 감소. 채취 포트 폐쇄 확인. 인간 장비 신호의 위장 금지.

하리시가 보고서를 읽고 짧게 물었다. “이걸 성공이라고 적을 겁니까?”

“부분 성과라고 적겠습니다.”

“부분 성과로는 총괄 회의가 버티기 어렵습니다.”

“완전한 실패로 적으면 해류 재투입 명령이 내려옵니다.”

하리시의 시선이 화면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압력이 있습니다. 세이렌은 분쟁 중재기 권한 회복을 요구합니다. 공개 채널은 원신호 전부를 달라고 하고요.”

“둘 다 안 됩니다.”

“둘 다 안 되는 답은 회의에서 오래 못 버팁니다.”

“그래도 지금 사실입니다.”

도경은 회수 규칙을 다시 확인했다. 해류는 단순 도구가 아니었다. 인간 기관의 명령 순서, 고래 신호의 동의 추정, 위험 등급 변환, 항만 통제까지 묶여 있었다. 해류를 빼면 번역 한 칸이 비는 것이 아니었다. 연결된 회로가 줄줄이 느려졌다. 사람들은 그 회로에 기대며 살았고, 기대는 동안 그 무게를 잊었다.

드론 회수 영상이 들어왔다. 흰 부표 하나가 바닥 가까이 흔들렸다. 바로 위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모계 7인지, 다른 개체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도경은 확대하지 않았다. 확대하면 더 안다는 착각이 왔다. 대신 시간표를 봤다. 부표를 피해 이동한 흔적은 있었다. 짧지만 있었다.

항만청 연락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쪽 길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까?”

“동쪽 길을 피하지 않았다고만 볼 수 있습니다.”

“그 표현으로는 명령을 못 냅니다.”

“그래서 명령을 줄입니다. 동쪽 대형 선박 통과 금지. 소형 구조선만 대기. 남쪽 채취 중지.”

“경제 피해가 커집니다.”

“가스대 건드리는 것보다 작습니다.”

연락관은 불편한 얼굴로 승인을 올렸다. 최종 승인은 자동 중재 회로를 통과해야 했다. 해류 배제 상태라 회로는 수동 심사로 넘어갔다. 예상 처리 시간 사십이 분. 도경은 그 숫자를 보며 이를 맞물렸다가 풀었다. 사십이 분이면 늦다. 그러나 지금 거짓으로 빠른 답을 만들면, 누구의 명령인지 모르는 말이 바다로 들어간다.

김도현이 옆에서 낮게 말했다. “사십이 분 뒤에 이미 지나갔으면요.”

“기록합니다.”

“그게 다입니까?”

“아니요. 지금 가능한 우회만 합니다.”

도경은 항만청 비상 음성 회선으로 들어갔다. 명령은 못 내려도 권고는 남아 있었다. “남부 물목 동쪽, 대형 선박 자진 대기 요청. 근거는 원신호 직접 합의 절차 진행 중. 강제 명령 아님.”

회선 담당자가 되물었다. “그 표현 그대로 송출합니까?”

“그대로요. 확정이라고 쓰지 마세요.”

권고는 약했다. 하지만 몇몇 선박이 먼저 속도를 줄였다. 보험 문제를 따지는 목소리, 책임 소재를 묻는 목소리, 욕설이 섞였다. 도경은 음량을 낮추지 않았다. 느린 합의는 깨끗한 말로 오지 않았다. 각자 손해를 따지는 소음 속에서만 조금씩 움직였다.

화면의 수동 심사 시간이 이십구 분으로 줄었다. 그 사이 모계 7의 파형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도경은 그것을 승낙으로 쓰지 않았다. 단지 부표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 접근 반경을 유지했다는 사실, 인간 쪽이 채취를 멈췄다는 사실을 같은 줄에 묶었다.

부분 성과는 그렇게 생겼다. 누구도 만족하지 않는 크기로.

*

저녁이 되자 검증실 유리에는 화면빛이 겹쳐 비쳤다. 도경은 해류 창을 다시 열지 않은 채, 검은 비활성 아이콘을 바라봤다. 꺼진 중재기는 조용했지만, 조용하다는 이유로 무해하지 않았다. 켜져 있을 때는 너무 많은 것을 대신했고, 꺼지자 너무 많은 것이 빠졌다.

하리시의 최종 메시지가 들어왔다. 수동 권고 일부 승인. 동쪽 대형 선박 대기. 남쪽 채취 중지. 부표 유지. 적용 시간은 지연됐다. 이미 지나간 선박 두 척은 회수할 수 없었다. 다행이라는 말을 쓰기엔 손실이 남았고, 실패라고 쓰기엔 이동로가 조금 열렸다.

도경은 오늘의 기록을 묶었다. 해류 배제 절차, 원신호 직접 송신, 해석 불확실성, 지연 손실, 제한 성과. 마지막 항목에 손이 멈췄다. 결론. 도경은 잠시 빈 줄을 두었다.

아버지 기록 파일이 아래 탭에 남아 있었다. 낮에 뒤집어 둔 종이와 같은 항목이었다. 서도진은 마지막 날 해류 같은 중재기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더 순수했을까. 도경은 그 생각을 바로 지웠다. 도구가 없던 사람도 틀렸다. 도구를 가진 사람도 틀렸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손은 여전히 그의 표기법을 따라 쓰고 있었다. 그 사실이 수치스러워 펜을 바꿔 쥐었다.

김도현이 문가에 섰다. 퇴근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내일은 해류를 다시 붙여야 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한 건 뭡니까.”

도경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리가 뭘 잃는지 확인했습니다.”

“잃은 쪽이 더 커 보입니다.”

“그래도 누가 말하는지 모르는 답을 그대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김도현은 한 걸음 들어오다 멈췄다. “사람이 직접 들으면 더 책임질 줄 알았는데, 다들 책임 문구만 찾더군요.”

“고래도 우리 문장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럼 중간에 남는 건요.”

도경은 늦게 답했다. “느린 합의요. 불완전하고, 비싸고, 자주 늦는 것.”

그는 웃지 않았다. “그걸로 버틸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일부만요.”

그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남은 것은 결론이 아니라 거리였다. 김도현은 더 말하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리 벽을 작게 울렸다. 도경은 그 울림을 따라가지 않았다. 화면 속 남부 물목 지도에서 동쪽 선박들의 속도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도경은 결론란에 적었다. 완전한 자립은 불가능하다. 해류 없이 심해 코다의 층을 충분히 빠르게 풀 수 없고, 인간 절차는 위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완전한 의존도 불가능하다. 해류가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앞세우는지 모를 때, 빠른 답은 닫힌 문이 될 수 있다.

마지막 줄은 더 짧게 남겼다. 아무도 믿을 수 없을 때 기대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서로 확인하는 느린 절차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파일 상태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바뀐 것은 많지 않았다. 해류는 꺼져 있고, 바다는 기다려 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내일 다시 더 빠른 답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도 오늘의 한계는 문장으로 고정됐다.

완전한 자립도, 완전한 의존도 불가능하다. 도경은 그 문장을 보고 한 줄을 더 열었다. 이 느린 절차가 다음에 무엇을 부술지, 아직 기록할 증거는 없었다. 그래서 빈 줄로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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