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보내며
헤드폰 케이스가 보관함 안쪽에서 걸렸다. 도경은 손을 더 밀어 넣어 낡은 모서리를 잡았다. 플라스틱이 손등을 긁고 나서야 케이스가 빠졌다.
방은 낮인데도 어두웠다. 관측소 후면의 작은 기록실이라 창은 하나뿐이었고, 그 창도 바다 대신 방파제의 회색 면을 보여 주었다. 도경은 탁자 위에 케이스를 놓고 잠금쇠를 열었다. 이어 패드의 갈라진 선들이 마른 해초처럼 벌어져 있었다. 서도진의 이름표는 반쯤 벗겨졌고, 접착제 자국만 흐리게 남아 있었다.
도경은 이름표를 다시 붙이지 않았다. 손끝으로 눌러 보지도 않았다. 오래 붙들수록 증거처럼 굳는 물건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있었다는 증거, 사라졌다는 증거,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증거. 한때는 셋을 나누지 못했다.
“용서합니다.”
소리가 낮아서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말하고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탁자 위 장비의 절전등은 같은 박자로 깜박였고, 케이스 뚜껑은 기울어진 채 멈춰 있었다.
도경은 곧바로 덧붙였다.
“그 방식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번 말은 조금 더 또렷했다. 아버지가 딸을 지키려 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는 믿음이었다. 확인되는 것은 그가 딸에게 묻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고, 그 믿음이 그 사실을 지우지 않았다. 기록을 숨기고, 위험을 혼자 계산하고, 남은 사람에게 빈칸을 넘긴 일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될 수는 없었다. 도경은 그 문장을 오래 피했다. 원망을 놓으면 배신하는 것 같았고, 용서를 말하면 아버지의 방법까지 인정하는 것 같았다.
둘은 같은 문장 안에 놓일 수 있었다. 용서와 거부. 나란히 두면 서로를 깎지 않았다. 도경은 케이스 안쪽의 얇은 먼지를 닦아냈다. 손수건에 검은 줄이 묻었다. 그 줄을 접어 숨기지 않고, 탁자 오른쪽에 똑바로 놓았다.
아버지를 향한 마음도 그렇게 두기로 했다. 깨끗한 것처럼 닦아내지 않고, 더럽다고 버리지도 않고, 닦은 흔적까지 남겨 두는 쪽으로.
기록실 단말에 서도진 파일 묶음이 떠 있었다. 원본 보존, 파생 접근 제한, 개인 소유물 인계. 행정어는 늘 감정을 피했다. 도경은 그 건조함이 오늘은 고마웠다. 울음을 요구하지도, 화해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서명란에 커서를 댔다. 이름을 쓰기 전 손이 한 번 멈췄다. 도경은 케이스를 보았다. 아버지의 물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명했다. 서도경. 한 글자씩 눌러 적었다.
*
오후 빛이 창턱을 조금 넘어왔다. 도경은 서도진의 마지막 기록 사본을 열지 않고, 파일 목록만 보았다. 날짜와 좌표, 짧은 메모, 손상된 음향 묶음. 이미 검증한 것들이었다. 더 들여다본다고 빠진 대답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도경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 문장은 이제 증명서 없이도 놓을 수 있었다. 어릴 때 실험실 냄새가 옷에 배어 들어오던 저녁, 서도진은 밥을 데우며 냄비 뚜껑을 두 번 떨어뜨렸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달걀을 하나 더 부쳤다. 도경은 그때 그 부침이 사과인지, 피로인지, 서툰 애정인지 묻지 않았다.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사랑은 있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도경은 빈 메모 창을 열었다. 문장 하나를 적었다가 지웠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였다.’ 너무 좁았다. 다시 적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이번에는 남겨 두었다. 그 아래 줄에는 천천히 썼다. ‘그러나 나를 대신해 결정할 권리는 없었다.’
두 문장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둘을 붙여 놓자 숨길 곳이 줄었다. 사랑했으므로 괜찮았다는 말도, 잘못했으므로 사랑이 아니었다는 말도 쉬운 도피였다. 도경은 쉬운 쪽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긴 것은 보호만이 아니었다. 윤서란의 침묵, 딸의 의심, 죽은 사람의 이름을 검증표 속에서 다시 꺼내야 했던 시간. 도경은 그 시간을 숫자로 세지 않았다. 세면 덜 아플 것 같아서였고, 세는 순간 값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받을 곳은 없었다.
단말 오른쪽 아래에 해류의 보관 정책 알림이 떠 있었다.
입력: 서도진 개인 기록 / 가족 접근 문서 후보: 원본 보존 / 감정 주석 비공개 / 공개 기록 분리 p: 0.72 / 0.64 / 0.61 상태: 인간 승인 필요
도경은 ‘감정 주석 비공개’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개인 메모로만 잠갔다. 해류가 틀려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기록 체계가 대신 나눌 일이 아니었다. 사랑과 판정 사이의 선은 도경이 직접 그어야 했다.
케이스 안쪽에서 작은 금속 부품이 굴러 나왔다. 헤드폰의 조절 나사였다. 도경은 그것을 손바닥에 올렸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조각이 이제 와서 나왔다. 끼워 넣을 수는 있었지만, 원래처럼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로 작은 봉투에 넣었다. 수리하지 않기 위해 보관하는 물건도 있었다. 망가진 모양까지 사실이었으니까.
*
해가 기울기 전, 도경은 관측소 뒤편의 낮은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물은 방파제 안쪽에서 느리게 찼고, 밧줄은 젖은 소리로 기둥에 닿았다. 조사선은 먼 곳에 묶여 있었다. 오늘은 운항 일정이 없었다.
도경은 방수 봉투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오전에 쓴 두 문장이 접힌 안쪽에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나를 대신해 결정할 권리는 없었다. 그 아래에는 조금 전에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 확인할 수 없는 채로 사랑하기로 한다.
그 문장을 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확인할 수 없는 채로 미워하는 일은 이미 해 보았다. 확인할 수 없는 채로 기다리는 일도 했다. 기다림은 자주 검증의 탈을 썼다. 새 파일을 열고, 손상된 파형을 복구하고, 아버지의 선택에 다른 이름을 붙여 보았다. 그러는 동안 도경은 아버지를 붙잡았고, 아버지가 설명하지 않은 방식을 반복했다. 대답 없는 사람에게 계속 대답을 요구했다.
도경은 종이를 다시 접었다. 바다에 버리지는 않았다. 버리면 의식이 되고, 의식은 너무 쉽게 결론처럼 보였다. 종이는 개인 기록 봉투에 넣었다. 남기는 쪽을 택했다. 다만 더는 심문장으로 쓰지 않기로 했다.
선착장 끝에는 오래된 수중 마이크 보관 상자가 있었다. 서도진이 쓰던 모델과 같은 규격이었다. 도경은 빈 슬롯 하나를 열고 헤드폰 케이스를 넣어 보았다. 크기가 맞지 않아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 억지로 누르면 들어갈 수도 있었다. 도경은 누르지 않았다.
케이스는 다시 팔 안쪽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기존 분류에 넣으려는 습관을 멈추자, 이상하게 할 일이 줄었다. 위인도, 가해자도, 희생자도, 설계자도 아니었다. 사랑했고 잘못한 사람. 일부를 남기고 일부를 거부해야 하는 사람. 도경의 아버지.
그 정도의 문장이 오늘은 충분했다.
물 아래에서 먼 진동이 올라왔다. 고래의 것인지, 케이블의 잔향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도경은 수신 앱을 켜지 않았다. 모든 소리를 의미로 바꾸려는 손을 멈추었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도 그랬다. 남은 전부를 해석해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경은 방파제의 녹슨 난간에 기대어 섰다. 바람이 종이 봉투의 모서리를 흔들었다. 봉투 안의 문장이 사라지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눌렀다. 사라지지 않게 하면서도, 더 증언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압력이었다.
평온이라는 말은 아직 크고 낯설었다. 대신 몸의 움직임이 단순해졌다. 파일을 닫고, 봉투를 접고, 케이스를 들고, 물소리를 그대로 두었다. 오늘 완성된 것은 결론이 아니라 자세였다.
*
저녁에는 기록실 불을 하나만 켰다. 도경은 서도진의 개인 물품 목록을 최종 확인했다. 헤드폰, 손상된 수첩, 녹음 장치 배터리, 소금에 삭은 천 가방. 회수 가능한 것은 네 가지뿐이었다. 되찾지 못한 스무 해에 비하면 너무 적었다.
도경은 목록 옆에 새 보관 위치를 입력했다. 공개 기록고가 아니라 가족 보관함. 접근 권한은 도경 단독. 원본 음향 자료는 연구 기록고에 남기고, 사적 물건은 다른 곳에 두었다. 아버지의 잘못은 공적 기록에서 빠지지 않아야 했다. 아버지의 낡은 물건까지 재판대 위에 계속 놓을 필요는 없었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잠금 장치가 낮게 울렸다. 금속 서랍 하나가 열렸다. 도경은 헤드폰 케이스를 안에 넣었다. 천 가방은 접어서 옆에 두었다. 수첩은 비닐을 새로 씌운 뒤 가장 아래에 놓았다. 손끝이 수첩 모서리에 닿았을 때 잠깐 멈췄지만, 펼치지 않았다.
“이제 더 묻지 않겠습니다.”
말은 서랍 안으로 떨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도경은 대답이 없는 상태를 고치지 않았다.
스무 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설명했어야 할 밤들, 윤서란이 혼자 견뎠을 식탁, 도경이 자기 의심을 능력으로 위장했던 시간도 그대로 남았다. 용서가 그 시간을 환불하지 않았다. 사랑이 잘못을 무효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낼 수 있었다. 돌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붙잡는 손의 이유가 줄었다.
도경은 서랍을 닫았다. 잠금 표시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닫힌 금속 면에는 도경의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피곤한 눈, 소금 자국이 남은 소매, 하루 종일 미뤄 둔 머리핀. 도경은 머리핀을 다시 꽂았다. 단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이 할 일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단말에 마지막 확인 문구가 떴다. ‘서도진 개인 물품 이관 완료.’ 도경은 확인을 눌렀다. 파일 묶음이 목록 아래로 내려가고, 화면의 빈칸이 넓어졌다. 그 빈칸에 새 문장을 쓰지 않았다.
기록실 밖으로 나오자 복도 끝 유리문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저녁 수면은 낮보다 어두웠고, 부표의 점멸은 작았다. 도경은 문을 열고 나가지 않았다. 유리 안쪽에서 충분히 보았다.
아버지, 하고 부르지 않았다. 서도진, 하고 적지도 않았다. 오늘 필요한 호칭은 이미 서랍 안에 들어갔다. 도경은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잠금 표시만 작게 남았다가, 절전 모드로 낮아졌다.
문을 닫기 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서랍은 닫혀 있었고, 아무것도 따라오지 않았다. 도경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멀어졌다. 뒤에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물건들과, 더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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