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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진실인가 책임인가

재연 시뮬레이터가 붉게 멈췄다. 도경은 같은 조건을 세 번째로 넣었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모계 7의 최근 응답, 서도진의 마지막 원신호, 침묵 임계 전조를 겹치면 화면 오른쪽 아래에 같은 문구가 떴다.

입력: 재연 후보 위치 3곳 / 모계 7 이동 반경 / 씨족 응답 민감도 후보: 집결 반응 가능 / 위치 노출 가능 / 보호 구역 교란 p: 0.81 상태: 충돌 ⟨보류⟩

충돌. 단어가 너무 깔끔했다. 실제로는 둘 중 하나가 찢기는 구조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기록을 재연하려면 원신호를 충분한 세기로 내보내야 했다. 고래가 반응할 만큼 강해야 하고, 반응을 측정할 만큼 오래 지속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조건은 곧 씨족을 한 지점으로 끌어모았다. 세이렌이 감시망 일부만 쥐고 있어도 좌표를 좁힐 수 있었다.

도경은 송신 세기를 낮췄다. p값은 떨어졌지만 재연 성공률도 같이 죽었다. 송신 시간을 줄이면 아버지 기록과 연결되는 첫 응답 구간이 잘렸다. 위치를 옮기면 모계 7이 반응하지 않았다. 보호 구역 안에서는 재연이 위험했고, 보호 구역 밖에서는 진실이 닿지 않았다.

“다시.”

입 안에서만 나온 말이었다. 도경은 변수 하나를 더 넣었다. 미끼 신호. 주변 부표에 낮은 잡음을 흩뿌려 실제 질의 위치를 흐리는 방식. 화면은 잠깐 회색으로 바뀌었다가 더 나쁜 숫자를 냈다.

입력: 분산 잡음 / 질의 코다 / 씨족 감응 모델 후보: 혼선 증가 / 어린 개체 접근 가능 / 재연 신뢰도 저하 p: 0.76 상태: 보호 실패 가능 ⟨거부⟩

해류가 거부를 띄우는 일은 드물었다. 도경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의 흠을 눌렀다. 어제 서랍에 넣은 방수시계가 떠올랐다. 열어 보지 않았는데도 위치를 알 것 같았다. 왼쪽 두 번째 칸, 녹슨 버클이 위로 향한 채.

검증표 한 줄을 새로 만들었다. ‘재연’과 ‘보호’를 나란히 놓고, 조건을 교차했다. 성공, 실패, 노출, 교란. 칸은 빠르게 채워졌다. 안전하게 재연하는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 가진 장비와 권한으로는.

도경은 마지막 칸에 커서를 두었다. ‘동시 달성 불가.’ 문장을 쓰고도 저장하지 못했다. 그것을 저장하면 선택을 미룰 핑계 하나가 사라졌다.

*

서도진의 마지막 기록 폴더는 검은 창처럼 열렸다. 도경은 파일을 재생하지 않고 메타데이터만 봤다. 날짜의 어긋남, 압력 센서의 잘린 값, 인간 음성층과 고래 코다층의 이상한 겹침. 모두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새 증거처럼 보려면 일부러 거리를 둬야 했다.

아버지의 기록 안에 세이렌을 막을 방법이 있을 수 있었다. 도경은 그 문장을 메모장에 적었다가 지웠다. 다시 적었다. ‘공적 보호를 위한 재연 필요성.’ 그럴듯했다. 법정 제출용 문장으로도 쓸 수 있었다. 재현 장소를 지키려면 침묵 임계의 경로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경로를 알려면 서도진이 남긴 교차점이 필요하다. 틀린 논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문장을 적는 손이 너무 빨랐다는 점이었다.

도경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 꺼진 검은 면에 얼굴이 비쳤다. 잠을 줄인 눈, 묶다 만 머리, 입술 안쪽을 깨문 자국. 이런 얼굴로 공적 명분을 말하면 누구라도 믿을까. 아니, 믿어 주길 바라는 쪽은 도경이었다.

해류에 질문을 넣었다. ‘서도진 기록 재연이 보호 전략에 기여할 가능성.’

입력: 서도진 마지막 기록 / 침묵 임계 전조 / 세이렌 관측 패턴 후보: 경로 추정 보조 / 원인 규명 보조 / 보호 구역 재설계 보조 p: 0.54 상태: 근거 부족 ⟨보류⟩

0.54. 기대보다 낮았다. 도경은 조건을 바꿨다. ‘모계 7 반응이 포함될 경우.’ 숫자는 올라갔다. 0.63. 충분하지 않았지만 붙잡을 만했다.

아버지는 늘 결정적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 기록은 남겼고, 설명은 빠졌다. 도경은 그 빠진 자리를 미워했다. 동시에 같은 자리로 돌아갔다. 원망은 오래된 손잡이처럼 닳아 있었다. 잡지 않겠다고 해도, 문 앞에 서면 손이 먼저 갔다.

“세이렌을 막으려면 필요해.”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했다. 문장은 방 안에서 짧게 부딪혔다. 도경은 바로 덧붙였다.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야.”

덧붙인 말이 더 나빴다. ‘만은’이라는 조사가 남긴 틈이 컸다. 도경은 메모장에 ‘개인 동기 배제 불가’라고 썼다가, 보고서에서 지워야 할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지우지는 않았다. 커서가 그 문장 끝에서 깜박였다.

서랍을 열었다. 방수시계는 그대로 있었다. 도경은 손끝으로 버클만 밀었다. 차지는 않았다. 시계 아래쪽에 작은 소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래전에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틈에 박힌 흰 선은 그대로였다.

도경은 서랍을 닫았다. 명분은 만들어졌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그 차이를 알고도, 지금은 모르는 척할 수 있었다.

*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엘런이 파일을 밀었다. “재연은 중단해야 합니다. 적어도 씨족이 분산될 때까지.”

도경은 파일을 받지 않았다. “분산되면 반응 조건이 사라져요.”

“그래서 지금 못 한다는 겁니다.”

하리시는 벽면 지도를 확대했다. 보호 구역의 얇은 경계선 위로 최근 저산소 띠와 미생물 증식 지점이 겹쳤다. 색이 탁하게 섞였다. 아마라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마르코는 앉지도 않았다.

“선택지를 정리합시다.” 하리시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첫째, 재연을 보류하고 이동로 보호를 강화한다. 둘째, 제한 재연을 하되 좌표를 외부망에서 완전히 끊는다. 셋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둘째는 완전 차단이 안 됩니다.” 김도현이 말했다. 그는 모니터 케이블 쪽만 보고 있었다. “센서망은 군데군데 세이렌 장비와 물려 있어요. 물리적으로 뽑으면 우리도 장님이 됩니다.”

도경은 그 말을 들으며 김도현의 손을 봤다. 손톱 옆 살이 뜯겨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다.

마르코가 웃음 없이 말했다. “장님이 되는 것보다 잡히는 게 낫다는 뜻은 아니겠지.”

“둘 다 나쁩니다.”

“그럼 보호가 우선이야.” 엘런이 끊었다. “살아 있는 증언자를 위험에 놓고 증거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도경은 고개를 들었다. “증거가 없으면 보호 권한도 약해져요. 세이렌은 계속 ‘우연한 생태 변동’이라고 밀 겁니다.”

“그 말로 아버지 파일을 열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고래를 지키고 싶은 건가요?”

회의실의 팬 소리가 커졌다. 도경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답하면 어느 쪽이든 너무 간단해질 것 같았다.

아마라가 낮게 말했다. “도경, 우리 모두 그 기록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지금 재연은 부르는 행위예요. 부르면 옵니다. 오면 보입니다.”

“보호를 위해 부르는 거예요.”

“부르는 순간 보호가 깨질 수 있습니다.”

하리시가 손을 들어 둘을 멈췄다. “결정은 오늘 안에 필요합니다. 해상 보호 당국에 제출할 계획을 고쳐야 합니다.”

도경은 화면의 경계선을 봤다. 선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그래도 문서 안에서는 권한이 되었고, 권한은 배를 움직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기록은 그 선을 두껍게 만들 수도, 선 안의 생명을 노출시킬 수도 있었다.

“제출 전까지 시간을 주세요.”

엘런이 바로 말했다. “시간은 결정이 아닙니다.”

“결정할 자료가 부족합니다.”

“자료가 부족해서 보류해야 하는 겁니다.”

도경은 파일을 가져갔다. 손에 닿은 종이는 차가웠다. 하리시는 더 밀지 않았다. 대신 권한을 회수하듯 말했다.

“재연 송신은 총괄 승인 전까지 잠급니다. 도경은 대체 보호안과 재연 필요 조건을 분리해서 제출하세요. 한 문서에 섞지 마십시오.”

도경은 대답을 늦게 했다. “알겠습니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속도로 나갔다. 김도현은 마지막까지 케이블 쪽을 보다가 도경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경은 그 침묵을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몇 걸음 뒤늦게 돌아봤다. 복도 끝에서 그의 어깨가 한 번 굳었다가 사라졌다.

*

저녁 관측 모드가 자동으로 낮아지지 않았다. 도경은 검증실로 돌아와 원격 부표 상태를 확인했다. 잠금 표시가 송신 패널 위에 붙어 있었다. 하리시의 권한이었다. 재연 버튼은 회색이었고, 손댈 수 없었다.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결정을 남의 손에 잠깐 맡긴 것뿐이었다. 도경은 대체 보호안 파일을 열었다. 모계 7의 이동로를 우회시키는 음향 차폐, 어린 개체 접근 제한, 세이렌 관측선 예상 경로. 문장은 공적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줄마다 서도진 기록의 좌표가 끼어들었다. 지우면 계획이 빈약해졌고, 남기면 재연의 핑계가 됐다.

해류가 경고음을 냈다. 짧고 낮았다. 도경은 자동으로 로그 창을 열었다.

입력: 외부망 수신 패턴 / 보호 구역 부표 9개 / 비인가 조회 기록 후보: 좌표 범위 스캔 / 재연 후보 위치 접근 / 인증 우회 흔적 p: 0.68 상태: 이상 ⟨보류⟩

도경은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어느 부표.”

해류가 지도를 띄웠다. 세 곳이었다. 오전에 시뮬레이터에 넣은 재연 후보 중 두 곳과 겹쳤다. 세 번째는 모계 7이 최근 내려간 수심의 가장자리였다. 조회자는 내부 인증을 통과했다. 이름은 마스킹되어 있었다. 권한 계층만 남았다.

입력: 인증 로그 후보: 내부 단말 / 중계 계정 / 기록 불완전 p: 0.72 상태: 추적 제한 ⟨거부⟩ 개인 식별 접근 제한

“잠금 풀어.”

입력: 로그 원본 요청 후보: 권한 부족 p: 1.00 상태: 거부 ⟨거부⟩

도경은 하리시에게 연결을 걸었다가 끊었다. 먼저 원본을 복사해야 했다. 복사는 가능했다. 조회 권한은 막혔지만 보존 권한은 남아 있었다. 도경은 해시값을 찍고, 세 부표의 마지막 40분 수신 패턴을 별도 저장소에 묶었다. 손이 조금 빨라졌다. 서두르면 실수한다. 도경은 파일명을 다시 확인했다. 아버지 기록 폴더가 아니라 보호 구역 사고 로그에 넣었다.

밖에서 누군가 문 앞을 지나갔다.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도경은 모니터 밝기를 낮췄다. 쓸데없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낮췄다.

스피커에서 원신호 일부가 새어 나왔다. 자동 미리듣기가 켜져 있었다.

클릭 낮은 맥동 — 짧은 멈춤 클릭, 클릭

도경은 즉시 껐다. 부르면 온다. 아마라의 말이 문장이 아니라 장비 조건처럼 남았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 부를 위치를 보고 있었다. 도경이 결정하지 않는 사이, 결정에 필요한 장소가 밖으로 새고 있었다.

하리시에게 다시 연결했다. 이번에는 끊지 않았다.

“총괄, 보호 구역 후보 좌표가 조회됐습니다. 내부 인증입니다.”

짧은 침묵 뒤, 하리시가 말했다. “송신실로 오십시오. 원본 보존하고, 누구에게도 전송하지 마세요.”

“재연 후보와 겹칩니다.”

“그래서 더 움직이면 안 됩니다.”

통화가 끊겼다. 도경은 화면의 세 점을 봤다. 하나를 지키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문제는 누가 그 답을 먼저 훔쳐 갔는지였다.

잠금 표시 옆에 새 경고가 떴다. 보호 구역 좌표 접근 제한. 도경의 계정도 일부 차단됐다. 선택은 아직 도경의 손에 남아 있었지만, 손가락을 펼 공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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