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손을 잡다
문이 닫히자 유리벽의 진동이 끊겼다. 도경은 접견실 안쪽 스피커가 내는 얇은 전기음을 먼저 들었다. 빅터 한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세이렌 로고가 지워진 임시 단말 하나만 놓여 있었다.
“회의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나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빅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었다. 채굴 해역 남단의 격자 지도가 떠올랐다. 붉은 선이 고래 이동로와 겹쳤고, 그 아래 세이렌의 심해 케이블이 파란색으로 깔렸다.
“당신 보고서가 맞다면, 우리도 손실을 봅니다.”
“이제야 보이십니까.”
“도덕 강의는 나중에 하죠. 모계 7이 우회하면 동쪽 채굴구역에 들어옵니다. 장비와 충돌하면 고래도 죽고 시설도 멈춥니다.”
도경은 화면을 확대했다. 빅터가 감춘 수치가 먼저 보였다. 장비 위치, 케이블 높이, 자동 회피 한계. 공개 자료에는 없던 값이었다. 세이렌은 자연 변동이라고 버티면서 내부에서는 이미 충돌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 자료를 왜 저한테 줍니까.”
“하리시에게 넘기면 압수 절차가 붙습니다. 언론으로 가면 세이렌은 방어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장 바다를 보죠.”
“당신은 지금 당장 자산을 봅니다.”
빅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사과가 아니었다. 계산표의 빈칸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도경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이지 않았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게 발끝을 바닥에 고정했다. 빅터 한이 위기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유용했지만, 그가 어디까지 내놓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세이렌은 늘 위험을 숫자로 줄인 뒤 자기 숫자만 살렸다.
“채굴구역을 닫으세요.”
“전면 중지는 안 됩니다.”
“그럼 대화 끝입니다.”
도경이 단말을 밀어내자 빅터의 턱이 굳었다. 그는 곧바로 붙잡지 않았다. 대신 다른 층을 열었다. 고래의 오래된 통과 지점, 아카이브 재현 장소, 최근 부표망이 한 화면에 겹쳤다.
“전면 중지는 이사회가 막습니다. 하지만 이 구역은 다릅니다.”
도경의 눈이 멈췄다. 붉은 원은 기억 재현이 일어났던 수중 능선을 감싸고 있었다. 모계 7이 오래된 코다를 반복하던 장소였다. 세이렌의 탐사 장비가 그 바로 아래에 박혀 있었다.
“무슨 제안을 하려는 겁니까.”
빅터는 처음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고 도경을 보았다.
“통제된 보호 구역을 만들겠습니다. 칠십이 시간. 내 권한으로.”
*
“보호가 아니라 봉쇄겠죠.”
도경의 말에 빅터는 얇게 웃었다.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용어는 당신이 정해도 됩니다. 나는 장비를 멈추고 접근을 막을 겁니다.”
“누구의 접근을요.”
“세이렌 탐사팀, 민간 촬영선, 활동가 보트, 무허가 연구 드론. 전부.”
도경은 손을 뻗어 능선 주변의 소음 기록을 열었다. 지난 사흘간 고주파 펄스가 계속 찍혀 있었다. 채굴 장비만이 아니었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드론, 연구선을 가장한 중계선, 고래의 코다를 팔아먹으려는 소형 송신기까지 섞여 있었다. 기억을 확인하려는 손들이 기억을 지우고 있었다.
“당신이 막으면 법적 명분은 뭡니까.”
“산업 안전. 해저 시설 충돌 위험. 작업자 대피. 아주 지루하고 강한 명분이죠.”
“고래를 위해서가 아니군요.”
“그 명분으로는 지금 못 막습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도경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고래의 기억을 보호하려면 고래를 이유로 삼을 수 없고, 세이렌의 설비를 이유로 삼아야 했다. 손잡이가 더러웠다. 그러나 문은 그 손잡이에 달려 있었다.
“칠십이 시간 동안 장비는 완전히 정지합니까.”
“능선 반경 이십 킬로미터. 능동 음파, 시추 보정 펄스, 바닥 스캔 중단.”
“수동 청음은요.”
“그건 남깁니다. 충돌을 피해야 하니까.”
“원자료 접근권.”
빅터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당신에게 실시간 뷰어를 주죠.”
“원자료입니다. 가공 화면 말고.”
“세이렌 서버 밖으로는 못 나갑니다.”
“그럼 현장 검증 인원을 넣겠습니다. 김도현. 하리시 승인 하에.”
빅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도경은 그 틈을 보며 계산했다. 그가 거절하면 제안은 홍보용이었다. 받아들이면 세이렌은 자기 통제 안에 감시자를 들이는 셈이었다. 어느 쪽이든 빅터의 목적이 드러난다.
“김도현은 장비 제어 권한이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됩니다.”
“녹화 금지.”
“검증 로그는 남깁니다.”
빅터가 손가락을 테이블에 한 번 눌렀다. 승인 신호였다. 단말 가장자리에 새 권한 목록이 올라왔다.
도경은 목록을 읽었다. 통제구역 설정, 접근 차단, 음파 장비 중지, 수동 청음 유지. 단어마다 세이렌의 냄새가 났다. 그래도 효과는 분명했다. 능선은 사흘 동안 조용해진다. 모계 7이 돌아온다면, 적어도 인간의 장비가 먼저 말을 걸지는 않는다.
“당신은 이걸 보호라고 부르겠죠.”
“당신은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도경은 화면의 원을 보았다. 통제선은 고래가 쓰는 길을 인간의 직선으로 잘라 놓고 있었다. 그 선 안에서만 기억이 잠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모순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임시 방음벽.”
“나쁘지 않군요.”
“칭찬으로 듣지 마세요.”
빅터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사과도 동의도 아니었다. 거래가 성립할 때 쓰는 최소한의 표시였다.
*
조건은 더 좁아졌다. 도경은 빅터의 단말에 직접 항목을 추가했다. 능동 송신 중지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박았다. 재가동은 도경, 하리시, 세이렌 안전책임자의 동시 확인 없이는 불가. 수동 청음 원자료는 해시값을 붙여 보관. 현장 드론은 반경 밖에서 대기.
“당신이 우리 운용 절차를 너무 잘 아는군요.” 빅터가 말했다.
“세이렌이 너무 많이 숨겨서 배웠습니다.”
“이 조항은 이사회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당신 권한으로 한다고 했죠.”
빅터는 두 번째로 침묵했다. 이번에는 길었다. 도경은 창밖의 회색 복도를 보았다. 경비 로봇 하나가 지나가며 바닥에 낮은 구동음을 남겼다. 이 건물 안에서 통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출입문, 카메라, 권한 등급, 말할 수 있는 문장까지. 그런 사람이 바다의 기억을 지키겠다고 했다. 지키는 방식도 닫고 막는 일이었다.
“마르코 쪽은 반발할 겁니다.” 빅터가 말했다. “그는 세이렌 통제선 안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마르코가 아니라 고래가 기준입니다.”
“당신이 그에게 그렇게 말하면 믿겠습니까.”
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코는 통제를 폭력으로 읽을 것이고, 틀렸다고만 할 수 없었다. 도경도 같은 문장을 어제까지 썼다. 하지만 지금 능선에는 너무 많은 장비가 몰려 있었다. 모두가 기억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주파수대를 더럽혔다.
“공개 문구는 어떻게 냅니까.” 도경이 물었다.
“해저 시설 안전 문제로 임시 제한. 생태계 영향 관측 병행.”
“고래 기억이라는 말은 빠지네요.”
“그 말을 넣으면 법무팀이 막습니다. 활동가들이 몰리고, 세이렌은 방어로 돌아섭니다.”
“늘 편한 쪽으로만 법을 쓰는군요.”
“이번에는 그 편한 법으로 시간을 사겠다는 겁니다.”
도경은 단말을 돌려 받았다. 문장 하나를 더 넣었다. 제한 기간 동안 수집된 생물 음향 자료는 독립 검증단에 보존 사본을 남긴다. 빅터가 바로 선을 그었다.
“보존 사본은 안 됩니다.”
“그러면 세이렌이 나중에 지울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죠.”
너무 쉽게 인정했다. 도경은 손을 멈췄다.
빅터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접근권을 당신에게 주는 겁니다. 지금 내 권한으로 사본까지 열면 제안 자체가 죽습니다.”
“나중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말로 남겠군요.”
“아마도.”
도경은 빅터의 얼굴에서 선의를 찾지 않았다.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세이렌의 손실을 줄이려 했고, 도경은 고래의 기억 재현 장소를 조용하게 만들려 했다. 두 선이 칠십이 시간만 겹쳤다. 그 이상을 믿으면 안 됐다.
“좋습니다. 조건부로 받겠습니다.”
빅터가 즉시 서명란을 열었다. “조건은 이미 충분히 많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조치가 세이렌 면책으로 쓰이면, 제가 먼저 공개 반박합니다.”
“당신은 늘 그렇게 하겠죠.”
“문서에 넣으세요.”
빅터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불쾌함이 지나간 자리에 계산이 남았다. 그는 문구를 넣었다. 본 조치는 책임 판단과 무관한 긴급 안전 조치로 한정한다. 도경은 문장을 세 번 읽고 확인했다.
서명이 끝나자 접견실 문 잠금이 풀렸다. 도경은 일어섰다. 빅터도 따라 일어났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 점만은 적절했다.
“우리는 동맹이 아닙니다.” 도경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착각하지 않습니다.”
“칠십이 시간입니다.”
“칠십이 시간.”
두 사람 사이에 합의서가 떠 있었다. 종이보다 얇고, 쇠사슬보다 단단한 화면이었다.
*
저녁이 되자 능선 주변 지도에 회색 원이 생겼다. 도경은 검증실에 혼자 남아 세이렌의 실시간 청음 창을 열었다. 접속 표시 옆에 빅터 한의 임시 권한 코드가 붙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손등에 먼지가 묻는 기분이었다.
소음 그래프는 천천히 내려갔다. 먼저 바닥 스캔 펄스가 사라졌다. 그다음 보정 신호가 끊겼다. 마지막으로 드론 중계음이 반경 밖으로 밀려났다. 화면은 조용해졌고, 그 조용함이 세이렌의 통제선 안에서 왔다는 사실이 계속 걸렸다.
김도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현장 접속 확인. 원자료 해시값 저장 중. 도경은 짧게 답했다. 재가동 신호 먼저 보세요. 자동 복구 루틴도.
잠시 뒤 수중 스피커에 낮은 클릭이 들어왔다.
클릭. 긴 간격. 클릭, 클릭— 멀어진 하강음. 침묵.
도경은 볼륨을 올리지 않았다. 소리를 크게 만든다고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파형은 깨끗해졌지만, 모계 7의 위치는 아직 능선 밖에 있었다. 돌아올지, 지나칠지, 부딪힐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인간이 만든 잡음 하나가 줄었다. 그 하나를 위해 도경은 적의 문을 통과했고, 적의 권한으로 열린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상 가장자리에 서도진의 주석 파일이 반쯤 열려 있었다. 도경은 닫지 않았다. 아버지는 통제선을 반대했고, 마지막에는 혼자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도경은 오늘 통제선을 이용했다. 그 차이가 변명인지 선택인지, 지금 판정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책상 위 작은 흠집을 문지르다가 멈췄다. 같은 자리를 더 만지면 살갗만 벗겨진다.
하리시의 승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임시 제한 발효. 독립 검증단 배정. 법무 검토 대기. 문장들은 차례로 불이 들어왔고,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세이렌 협력 채널 개설.
도경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협력이라는 말은 너무 깨끗했다. 실제로는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밸브를 잠근 것뿐이었다. 빅터는 손실을 막고, 도경은 기억이 다시 울릴 공간을 지킨다. 같은 배에 오른 사람들은 같은 방향을 보지 않아도 물에 빠지는 순서는 함께 계산해야 했다.
도경은 새 보고서의 상태란에 한 문장을 넣었다. 능선 반경 음향 교란은 임시 감소. 기억 재현 장소의 단기 보존 가능성 확보. 책임 판단은 보류하지 않음.
저장했다. 손에 남은 건 하나였다. 통제하려는 손도 때로는 무언가를 막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손을 잡는 순간, 잡은 쪽도 통제선 안에 들어간다.
스피커에서 다시 클릭이 들어왔다.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멀었다. 도경은 세이렌 채널을 닫지 않았다. 닫을 수 없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빅터의 이름이 작은 접속 표시로 남아 있었다.
도경은 그 표시를 끄지 않은 채 다음 수신을 기다렸다. 오늘 밤 도경은 적과 한 배를 탔다.
이 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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