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무명비
제1화 · 1/30

서 있는 사람

사내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런데 진소백의 눈에 먼저 걸린 것은 그 말이 아니라, 서 있는 모양이었다.

배가 아픈 사람은 대개 몸을 앞으로 조금 접는다. 손을 아랫배에 대거나, 들어서자마자 앉을 자리부터 찾는다. 그런데 이 사내는 문지방을 넘어와서도 허리를 곧게 편 채였다. 앉으시라 평상을 가리켰는데도,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천천히 걸터앉았다.

발끝이 방문 쪽이 아니라, 마당 쪽을 향해 있었다.

배 아픈 사람이 발끝을 어디에 두든 무슨 상관이랴 싶으면서도, 진소백은 자꾸 그 발끝을 보았다. 어쩐지, 나가는 길을 먼저 봐 둔 사람 같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십니까."

약재를 고르던 고진명이 물었다. 마른 뿌리 하나를 집어 코끝에 대 보고, 옆으로 밀어 놓고, 다른 것을 집었다. 진소백이 어릴 적부터 봐 온 손이었다. 마디마다 약물이 배어 누렜고, 엄지 안쪽에는 약칼을 오래 쥐어 박인 굳은살이 있었다.

"어제부터 속이 뒤틀립니다. 찬 걸 잘못 먹었나 싶은데."

말투는 공손했다. 눈매도 사나울 것이 없었다. 행상이라 해도, 먼 길 가는 길손이라 해도 그런가 보다 할 얼굴이었다. 진소백은 오히려 그 점이 걸렸다. 말도 얼굴도 흠잡을 데가 없는데, 몸만 자꾸 어긋났다.

고진명이 다가가 손목을 짚었다. 사내가 소매를 걷어 팔을 내밀자, 손등에 오래 박인 굳은살이 잠깐 보였다. 붓이나 약저울로 생기는 자국은 아니었다. 진소백은 그게 무엇을 쥔 자국인지 알지 못했고, 이내 잊었다.

고진명은 한동안 맥을 짚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손을 놓고, 약재를 묶던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던 손이, 묶다 만 약봉지 위에서 잠깐 멎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눈을 두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만큼. 고진명은 곧 다시 매듭을 지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봉지를 여며 옆으로 밀어 놓았다.

"찬 것에 상한 속입니다. 별것 아니에요."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말이 짧았다. 환자가 오면 고진명은 대개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잠은 어떤지, 물은 잘 마시는지, 먼 길을 왔는지. 오늘은 하나도 묻지 않았다.

"소백아, 향사양위탕 한 첩 지어 드려라. 두 번 나눠 달이시고."

진소백은 약장으로 갔다. 진피와 사인을 꺼내는데, 손이 익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움직였다. 어릴 적 "왜 이건 이만큼 넣어요?" 하고 물으면, 고진명은 답 대신 되묻곤 했다. "네가 보기엔 왜 그럴 것 같으냐." 그렇게 몇 번 되물리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 답을 찾고 있었다. 답보다, 답을 찾는 동안 손끝이 약을 기억하는 편이 오래갔다.

약을 싸는데, 코끝에 낯선 냄새가 걸렸다.

마른 약초와 달이는 물과 오래된 나무. 그 익숙한 것들 사이로 옅게 쇳내가 났다. 피 냄새라 하기엔 옅고, 이름 붙이기엔 낯선 냄새였다. 고개를 조금 들었지만, 그 냄새가 사내에게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약을 건네자 사내가 값을 치렀다. 동전을 내려놓으면서도 눈은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방문과 마당, 약장 뒤편. 진소백은 그 시선을 따라가다 멈췄다.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사내가 일어섰다. 일어서는 것도 앉을 때처럼 반듯했다. 무릎에 힘을 주는 기색도 없이 그냥 몸이 떠오르듯 섰다.

문을 나서기 전, 사내가 진소백을 한 번 보았다. 노려본 것도, 웃은 것도 아니었다. 들어올 때 스쳐 보고 지나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눈이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 진소백은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었다. 약을 잘못 쌌나, 값을 더 받았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발소리가 마당을 밟고 멀어졌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고진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약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밀어 두었던 봉지를 제자리에 놓고, 저울을 닦고, 마른 뿌리를 종류대로 갈랐다. 진소백은 평상에 놓인 동전을 주워 모으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스승님."

"음."

"저 사람, 정말 배가 아픈 거 맞아요?"

고진명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저울추를 걸고, 헝겊으로 손을 닦았다.

"맥이 그렇더구나."

"맥은 그런데, 걷는 게 아픈 사람 같지 않던데요."

"아픈 사람도 여러 가지다. 배가 아프다고 다 허리를 접고 다니는 건 아니지."

"그래도 이상했어요."

"이상한 걸 다 붙들면 의원 노릇 못 한다. 그보다 향사양위탕 두 번째 첩이나 미리 싸 두어라."

"그 사람이 다시 온답니까?"

"오든 안 오든, 약은 미리 지어 두는 거다."

진소백은 남은 진피를 저울에 올리며 곁눈으로 문 쪽을 보았다. 스승은 더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진소백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고진명은 이렇게 받아 넘기지 않았다. 그래, 네가 보기엔 왜 그럴 것 같으냐, 하고 되물었을 것이다. 오늘은 되묻지 않았다. 답 같지 않은 답 하나로 끝이었다.

왜 스승은 저 사람에게만 저렇게 말이 짧았을까.

몇 번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이었다. 진소백은 동전을 셈해 돈궤에 넣고, 저녁 지을 물을 길으러 나갔다.

우물은 마을 어귀 느티나무 곁에 있었다. 두레박을 내리자 차가운 물이 올라왔다. 물동이를 채워 어깨에 올리는데 하늘이 벌써 붉었다. 늦가을 해는 짧았다. 낮의 소란이 가라앉고 지붕마다 저녁연기가 오르는 시간을, 진소백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이 마을에서 자란 세월이 그만큼이었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스승이 오늘 저녁엔 또 무슨 타박을 할지 잠깐 생각했다. 파가 덜 익었다거나, 불이 세다거나. 그런 타박이 있는 저녁이 그는 싫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뒷마당에 등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진소백은 물동이를 부엌 앞에 내려놓았다. 물이 한쪽으로 쏠려 찰랑였다.

고진명이 등불 아래 앉아 있었다. 손에는 진소백의 헌 신발 한 짝이 들려 있었다. 바닥이 닳고 코가 벌어진 신이었다.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삼실을 꿰어 벌어진 자리를 여미는 중이었다. 굳은살 박인 손이 실을 당길 때마다 등불이 조금씩 흔들렸다.

진소백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보고만 있었다. 낮에 온 낯선 사내도, 하루의 이상한 일도 스승의 손끝에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신 한 짝에만 매달려 있었다. 등불에 비친 그림자가 마당 흙 위로 길게 누웠다.

"그거 그냥 버리세요."

진소백이 물동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새로 하나 사면 되잖아요. 장에 나가면 얼마 하지도 않는데."

"아직 신을 만한 걸 왜 버려."

고진명이 실을 이로 끊었다.

"바닥 다 닳았는데요."

"바닥이 닳았으면 바닥을 대면 되지."

"그 바닥도 닳으면요?"

"그때 또 대면 되지."

"그러다 신은 없고 바닥만 남겠습니다."

"그럼 그 바닥을 신어라."

진소백은 웃음이 났다. 스승은 웃지 않았지만, 실을 당기는 손끝이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 진소백은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앉았다. 등불 곁이 따뜻했다. 삼실이 매듭을 지었다 풀렸다 하는 걸 보고 있으니, 낮의 일이 조금 멀어졌다.

"스승님은 뭐든 오래 걸려요. 신도 그렇고, 저 가르치는 것도 그렇고. 그냥 답을 알려 주면 빠를 텐데."

고진명이 손을 멈추고 진소백을 보았다. 웃는 것도, 나무라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서두른다고 빨리 되는 건 아니다."

그는 다시 신으로 눈을 내렸다.

"손이 먼저 기억해야 오래가. 머리로만 알면 금방 잊어버리고."

여러 번 들은 말이었다. 진소백은 대꾸하지 않고 등불만 보았다. 마당 한쪽에서 풀벌레가 울었고, 스승의 손끝에서 삼실이 매듭을 지었다 풀렸다 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열 몇 해를 같은 지붕 아래 산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고진명이 신을 다 여며 두 짝을 나란히 댓돌에 올려놓았다. 헌 신이었지만, 나란히 놓으니 제법 신을 만해 보였다.

"들어가서 밥이나 짓자."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 모습은 여느 저녁과 다르지 않았다. 등이 조금 굽고, 무릎에서 소리가 나고. 진소백은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담장 너머,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

거기, 낮에 왔던 사내가 서 있었다.

진소백은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배가 아프다고 약을 지어 간 사람이, 해가 다 지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을 뉘러 객잔으로 갔어야 할 사람이었다.

낮에 왔던 사람이, 아직 가지 않았다.

← 이전화목차다음화 →

이 화, 어떠셨나요?

미리보기 — 댓글은 지금 이 브라우저에만 임시로 저장됩니다. 배포하면 Cloudflare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