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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 19/30

이웃의 얼굴

하 노인은 밤새 숨을 쉬었다.

쉬었다, 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살아 있었다고 하기에는 그 숨이 너무 얇았다. 꺼진 등잔 심지 끝에 남은 붉은 점처럼,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사라질 듯했다가 다시 겨우 빛을 되찾았다.

진소백은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약낭이 놓여 있었다. 손가락 끝에 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 마른 풀, 오래된 뿌리, 씁쓸한 껍질, 짓이긴 잎. 사람을 살리는 냄새라 믿고 살아온 것들이 그날 밤에는 유난히 가볍게 느껴졌다.

하 노인의 가슴은 들쑥날쑥했다. 피가 멎은 자리는 천으로 눌러 묶었고, 열은 조금씩 올라왔다. 진소백은 물수건을 갈아 주고, 입술이 마를 때마다 젖은 천을 대었다. 하 노인의 눈꺼풀은 한 번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가끔 목 안에서 쇳가루 같은 숨이 긁혔다.

“하 어르신.”

대답은 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진소백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 노인을 위한 것인지, 아직 그를 놓을 수 없는 자신을 위한 것인지.

새벽이 가까워지자 골목의 소리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먼 곳에서 물동이를 내려놓는 소리, 닭이 잘못 짚은 시간에 우는 소리, 누군가 나무문을 여닫는 소리. 밤새 죽은 듯 엎드려 있던 동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평범한 소리가 진소백의 가슴을 찔렀다.

어제 밤에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는 물을 길러 나왔고, 누군가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누군가는 앓는 아이에게 식은 죽을 떠먹였을 것이다. 그 사이 하 노인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진소백은 늦었다.

하 노인이 피습당한 방은 크지 않았다. 허름한 침상 하나와 낡은 상, 벽에 기대 둔 빈 바구니, 물기 없는 사발. 진소백은 처음 그 방에 들어왔던 순간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문은 부서져 있지 않았다. 문짝 한쪽이 안쪽으로 비스듬히 밀려 있었을 뿐이다. 거칠게 박살 낸 흔적은 없었다. 세력의 급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조용한 시작이었다.

물론 그 뒤의 소란은 있었다. 골목 끝에서 낯선 발소리들이 밀려왔고, 칼바람 같은 기척들이 집들을 짓눌렀다. 진소백이 하 노인의 피를 막는 동안, 사람들은 문을 걸고 숨을 죽였다. 무림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그런 공포가 남았다.

하지만 처음.

처음 하 노인이 문을 열었을 그 순간이, 자꾸만 진소백의 안에서 걸렸다.

하 노인은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래 숨어 산 사람은 아무에게나 문을 열지 않는다. 특히 그날 밤처럼 진소백에게 명단을 보고, 얼굴빛이 달라졌던 뒤라면 더더욱.

하나가…… 많아.

하 노인의 그 말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한 채 진소백의 귓속에 걸려 있었다. 뜻은 알 수 없었다. 알려고 붙잡으면 더 멀어졌다. 다만 그 말을 한 뒤 노인의 손이 떨렸고, 눈동자가 잠깐 진소백을 지나 문 쪽으로 흔들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문밖을 지나갔던가.

바람이었을 수도 있었다. 오래된 문이 스스로 운 것일 수도 있었다. 기억은 다친 사람처럼 자꾸 한쪽으로 절뚝거렸다.

“선생.”

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소백은 고개를 들었다. 문틈 사이로 셋째 사망자 집 여인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름보다 누구의 아낙, 누구의 어미로 불리는 일이 더 익숙한 여인이었다. 눈 밑이 푹 꺼져 있었고, 손에는 작은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여인은 발끝으로 방 안에 들어와 상 옆에 보자기를 놓았다. 보리죽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잘 넘기실까요?”

진소백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살릴 수 있다, 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은 더더욱.

“아직 봐야 합니다.”

여인은 그 대답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다가, 하 노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젯밤에도 밥을 놓으려 했는데…… 문 앞에 먼저 누가 있더군요.”

진소백의 손이 멈췄다.

여인은 곧 후회한 얼굴이 되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리면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누구였습니까?”

“못 봤습니다. 등불도 없었고…… 그냥 그림자만. 저는 남의 일에 끼는 게 무서워서, 보자기만 담 밑에 놓고 돌아왔습니다.”

“걸음은요.”

묻고 나서 진소백은 입술을 다물었다. 질문이 너무 날카로웠다. 여인은 대답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을 잃었고, 밤마다 하 노인 문 앞에 밥을 놓아 온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지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여인은 한참 생각했다.

“소리는 가벼웠습니다. 무공하는 사람들처럼 땅을 안 밟는 소리도 아니고, 술 취한 사람처럼 끄는 소리도 아니고. 그냥…… 우리 동네 사람 걸음 같았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

그 말이 방 안에 오래 남았다.

진소백은 죽그릇을 받아 상 위로 밀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무얼 봤다고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 앉지 못했다. 나가려다 문가에서 멈추었다.

“선생, 이 동네 사람들 다 겁이 많습니다. 못돼서가 아니라…… 잃을 게 너무 적어서 더 겁이 많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나갔다.

진소백은 한동안 문을 바라보았다. 하 노인의 숨소리가 다시 거칠어졌다. 그는 물수건을 갈았다. 손은 익숙한 일을 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맸다.

우리 동네 사람 걸음.

그 말은 아무 단서도 아니었다. 너무 넓고, 너무 흐렸다. 이 골목의 사람들은 모두 가난했고, 모두 밤에 움직일 이유가 있었다. 낮에 일을 못 끝낸 사람은 밤에 물을 길었고, 약한 불로 새벽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밤에 골목을 건넜다. 앓는 가족을 둔 집은 수시로 문을 열었다. 누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무림 고수의 그림자라면 차라리 쉬웠다. 멀리서 온 검은 옷의 사내, 이름 모를 문파의 살수, 은밀한 명령을 받은 자. 그런 얼굴은 상상하기 쉽고 미워하기도 쉽다. 그들은 애초에 이 골목의 사람이 아니니, 골목의 밥 냄새와 아이 울음과 젖은 빨래 사이에 섞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을 두드렸을 때 하 노인이 경계하지 않았을 사람.

밤에 골목을 걸어도 누구 하나 문틈으로 오래 보지 않을 사람.

물가를 잘 알고, 물소리에 발소리를 숨길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낯선 자가 아니었다.

진소백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또 다른 얼굴들이 떠올랐다. 새벽마다 강가로 나가는 생선장수, 술집에서 남은 술지게미를 얻어 가는 노파, 빨래터를 오가는 계집아이들, 배를 묶는 사내들. 모두가 가능했고, 그래서 아무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사람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밥을 놓아 주던 손, 아이를 업고 지나가던 등, 빚쟁이에게 고개 숙이던 얼굴, 아궁이 앞에서 기침하던 노인. 그 모든 것을 하나씩 꺼내 의심의 불빛 아래 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병을 살피는 일과 달랐다. 맥을 짚고 열을 재는 일에는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에는 지키고자 하는 것보다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 하 노인의 열이 잠깐 내려갔다. 진소백은 그 틈에 밖으로 나왔다. 오래 앉아 있던 무릎이 굳어 있었다. 골목은 밝았으나 평소보다 조용했다. 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피했다. 문은 열려 있어도 문 안쪽의 그림자는 깊었다.

그는 우물가로 갔다. 물을 뜨는 사람들은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다쳤는지, 누가 왔었는지, 누구 집 문이 밤새 닫혀 있었는지. 진소백은 그 말들을 잡지 않으려 했다. 잡는 순간 그것들이 사람의 살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우물 옆 돌에는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비가 온 지 오래였다. 물동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흙먼지와 섞여 발밑에 얇게 번져 있었다. 그 위로 수많은 발자국이 겹쳐 있었다. 크고 작고, 깊고 얕고, 맨발과 짚신과 헌 신. 진소백은 그것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보려 들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물길 쪽으로 걸었다. 좁은 골목이 낮은 담벼락 사이로 기울어지다가,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물 냄새가 올라왔다. 강이라 부르기에는 작고, 개천이라 하기에는 깊은 물길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그곳에서 빨래를 하고, 물건을 씻고, 더운 날에는 아이들의 발을 담갔다. 밤이 되면 물소리가 모든 소리를 조금씩 삼켰다.

진소백은 둑 위에 섰다.

허봉이 늘 서 있던 자리였다.

허봉은 물가를 잘 알았다.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살았고, 여기서 벌었고, 여기서 빚쟁이들을 피해 돌아다녔다. 허만복이 열에 들떠 끙끙 앓던 밤에도 허봉은 이 물길을 따라 약초 달일 물을 길어 왔다. 그때 그의 손은 떨렸다. 진소백이 아이의 이마를 짚자 허봉은 숨을 참듯 서 있다가, 열이 조금 내렸다는 말에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그 얼굴을 기억했다.

진소백은 그 얼굴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아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허만복이 달려오다 멈춰 섰다. 아직 몸이 완전히 오른 아이는 아니었다. 볼은 예전보다 조금 살이 붙었지만, 뛰고 나면 가슴이 금방 오르내렸다.

“천천히 오너라.”

허만복은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아이 손에는 찢어진 연줄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가 선생님 보이면 인사하랬어요.”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물건 나르러 갔어요. 새벽부터요.”

새벽부터.

진소백은 그 말에 아무 뜻도 얹지 않으려 했다.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는 사람은 많았다. 허봉도 늘 그랬다. 빚을 갚으려면 하루를 둘로 쪼개 써야 한다고 웃던 사람이다. 웃음 끝이 늘 쓰게 접히던 사람이다.

“몸은 어떠냐.”

“괜찮아요. 이제 안 어지러워요.”

진소백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지만 병열은 아니었다. 허만복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아이는 의심을 모른다. 자신을 살펴 주는 손을 의심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이 어른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무거워지는지도 모른다.

그 순진함이 진소백을 더 아프게 했다.

“무리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 바람이 차다.”

“네. 그런데 하 할아버지는 많이 아파요?”

진소백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허만복은 하 노인을 할아버지라 불렀다. 골목의 아이들은 대개 그랬다. 하 노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면서도 가끔 말린 대추를 나눠 주었다. 허만복이 아팠을 때에는 문 앞에 낡은 이불 한 채를 놓고 간 적도 있었다. 누가 놓고 갔는지 모르게 하려 했지만, 이 동네에서 그렇게 오래된 약초 냄새가 밴 이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쉬고 계신다.”

“그럼 제가 나중에 죽 가져가도 돼요?”

진소백의 목이 잠겼다.

“나중에. 지금은 조용히 쉬셔야 한다.”

허만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뛰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숨이 차서 걷기 시작했다. 작은 등이 골목 모퉁이에 사라질 때까지 진소백은 움직이지 못했다.

허봉일 리 없다.

그 말이 먼저 올라왔다.

허봉은 아이를 안고 밤새 떨던 사람이다. 싱거운 국 한 그릇도 미안해서 두 손으로 내밀던 사람이다. 진소백이 약값을 받지 않자, 다음 날 새벽 문 앞에 말린 생선 두 마리를 놓고 도망가듯 사라졌던 사람이다. 하 노인에게도 그랬다. 밤에 밥을 놓아 주는 사람들 틈에 허봉이 있었다. 직접 주지 않고 문 앞에 두었다. 하 노인이 성을 낼까 봐, 또는 고마움을 말해야 할까 봐 서로 민망해질까 봐.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데 왜.

그 생각이 이어지려는 순간 진소백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가를 잘 안다는 것, 밤에 나갈 이유가 있다는 것, 하 노인이 문을 열었을 법한 얼굴이라는 것.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 죄의 모양과 닮아 보이는 순간, 보는 이의 마음이 먼저 썩는다.

그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허봉을 찾아가 물을 수도 있었다. 어젯밤 어디 있었습니까. 하 노인 문 앞에 갔습니까. 누굴 만났습니까. 묻는 순간, 그 질문은 이미 칼보다 깊게 사람을 벨 것이다. 진소백은 무기를 지니지 않았으나 말은 때로 손에 없는 날붙이가 되었다.

그는 골목을 돌아 하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발은 곧장 가지 않았다. 허봉의 집 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허봉의 집은 낮은 처마 아래 오래된 문짝이 기울어져 있었다. 문틈으로 아궁이 재 냄새가 났다. 안쪽에서 여인의 기침 소리가 들렸고, 그 뒤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가난은 소리도 작게 낸다. 무언가 깨질까 봐, 남이 들을까 봐,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까지 들킬까 봐.

진소백은 손을 들었다.

문을 두드리면 된다. 허봉을 찾으면 된다. 얼굴을 보고, 평소처럼 말을 걸면 된다. 그러면 이 의심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흩어질지도 모른다. 허봉은 눈을 크게 뜨고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웃지도 못하고 억울해할 것이다. 그러면 진소백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손이 문에 닿기 전에 안에서 허만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선생님이 하 할아버지 쉬신댔어요.”

“그래. 큰소리 내지 마라.”

“아버지는 언제 와요?”

잠깐 침묵이 있었다.

“일 끝나면 오시겠지.”

그 평범한 대화가 진소백의 손을 붙들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몸을 돌렸다. 가슴 한가운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 노인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노인은 잠깐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은 흐렸지만 진소백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 어르신. 들리십니까?”

하 노인의 입술이 떨렸다. 진소백은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말인지 숨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문……”

진소백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문을 열었습니까? 누가 왔습니까?”

하 노인의 손가락이 이불 위에서 긁히듯 움직였다. 진소백은 그 손을 잡았다. 뼈만 남은 손이었다. 뜨겁고 가벼웠다.

“……밥……”

그뿐이었다.

하 노인의 눈꺼풀이 다시 내려갔다. 숨이 얕아졌다. 진소백은 더 묻지 못했다. 묻는 것이 사람을 죽음 쪽으로 밀어 넣는 일처럼 느껴졌다.

문. 밥.

그 두 마디가 방 안을 떠돌았다.

밤마다 문 앞에 밥을 놓던 사람들. 하 노인이 문을 열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그중에는 허봉도 있었다. 셋째 사망자 집 여인도 있었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들, 누구의 이웃도 있었다.

진소백은 하 노인의 손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았다. 마음이 한쪽으로 가려 할 때마다 그는 억지로 붙잡았다. 아직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한 번 죄인처럼 부르면, 그 이름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해가 기울자 골목에는 밥 짓는 냄새가 퍼졌다. 좁은 집들마다 연기가 낮게 흘렀다. 어떤 집은 보리 냄새가 났고, 어떤 집은 무청 삶는 냄새가 났다. 그 냄새들은 오래된 평화처럼 골목을 덮었으나, 진소백에게는 그 평화가 얇은 종이처럼 느껴졌다. 손끝만 대도 찢어질 것 같았다.

그는 저녁 약을 달였다. 물이 끓는 동안 마당에 앉아 불빛을 보았다. 불은 바람이 불 때마다 납작하게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허봉이 처음 찾아왔던 밤이 떠올랐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였다. 비가 오고 있었다. 허봉은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거의 쓰러지듯 들어왔다. “돈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아이의 숨이 거칠었고, 이마는 불덩이였다. 진소백이 아이를 눕히라 하자 허봉은 젖은 팔로 아이를 감싸며 놓지 못했다. 놓으면 빼앗기는 줄 아는 사람처럼.

그 밤 진소백은 허만복을 살렸다. 아니, 살리려 애썼고 아이가 버텼다. 허봉은 새벽까지 방구석에 꿇어앉아 있었다. 아이의 열이 내리자,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진소백의 손등에 이마를 대려 했다. 진소백은 놀라 손을 빼며 그러지 말라 했다. 허봉은 민망하게 웃었다.

그 얼굴.

진소백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얼굴 위에 다른 그림자가 겹쳤다. 하 노인의 문 앞에 서 있었을지도 모를 등. 물소리 속을 걸었을지도 모를 발. 밥 보자기를 들고 왔다며 문을 두드렸을지도 모를 손.

그럴 리 없다.

그런데 왜 하 노인은 문을 말했을까. 왜 밥을 말했을까. 왜 그날 밤, 낯선 무림인의 난폭함보다 먼저 가까운 사람의 조용한 방문이 떠오르는가.

진소백은 약탕관을 불에서 내렸다. 손등에 뜨거운 김이 닿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살짝 데인 통증이 오히려 생각을 끊어 주었다.

밤이 내렸다.

골목은 다시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일찍 문을 걸었다. 하 노인의 집 앞에도 작은 보자기 하나가 놓였다. 진소백은 문을 열고 그것을 들었다. 식은 밥과 무 절임 조금, 그리고 얇은 천에 싼 소금 한 줌이 있었다. 누가 놓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동네의 선의는 늘 그렇게 얼굴을 숨겼다.

그는 보자기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얼굴을 숨긴 선의와 얼굴을 숨긴 악의는 밤에는 너무 비슷했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멀리 물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하고 낮은 걸음이었다. 진소백은 자신도 모르게 골목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둑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어깨선이 보이고, 짐을 멘 자세가 보이고, 익숙한 걸음이 보였다.

허봉이었다.

그는 지게를 한쪽 어깨에 걸친 채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낮 동안 무거운 것을 나른 사람처럼 허리가 조금 굽어 있었다. 옷자락은 물에 젖었는지 어둡게 붙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곤이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진소백은 숨을 죽였다.

허봉은 하 노인의 집 앞을 지나치려다 멈추었다. 문 앞에 선 진소백을 보고 두 손을 어색하게 모았다.

“선생님.”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 조금 쉰, 조심스러운, 늘 미안함을 먼저 담는 목소리.

“늦게까지 고생하십니다.”

진소백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허봉의 눈가 잔주름이 보였다. 허만복이 웃을 때 닮는 부분이었다. 그 눈이 진소백을 피하지 않는지, 너무 오래 바라보는지, 떨리는지, 그는 보지 않으려 했다. 보려 드는 순간 자신이 정말로 이 사람을 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일이 늦었습니까?”

말이 나가고 나서야 진소백은 그것이 질문처럼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허봉은 지게끈을 고쳐 잡았다.

“예. 물가 쪽 짐이 밀려서요. 요즘은 다들 밤길을 꺼리니, 해 지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뜻대로 안 됐습니다.”

물가.

밤길.

그 말들이 죄 없는 돌멩이처럼 굴러와 진소백의 안쪽을 쳤다. 허봉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아니, 모르는지 아는지 진소백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하 하 어르신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허봉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걱정이 담긴 것처럼 들렸다. 진소백은 그 걱정을 믿고 싶었다. 간절하게 믿고 싶었다.

“아직 위태롭습니다.”

“그렇군요.”

허봉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골목 너머에서 문고리 거는 소리가 났다.

“제가 뭐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가진 건 없지만, 물이라도 길어 오겠습니다.”

진소백의 손에 들린 보자기가 무거워졌다.

밥. 문. 물길.

모든 것이 허봉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다가도, 곧바로 모두가 허봉을 변호했다. 그는 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가진 건 없지만 몸은 쓸 수 있다고. 그 말로 살아온 사람에게서 그 말을 빼앗아 죄의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 옳은가.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들어가 쉬십시오.”

“예. 선생님도…… 몸 상하지 마십시오.”

허봉은 다시 걸었다. 몇 걸음 뒤돌아보는 듯하더니, 결국 아무 말 없이 자기 집 쪽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그의 등을 삼켰다.

진소백은 문 앞에 선 채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방금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허봉은 자백하지 않았고, 이상한 흔적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한 이웃의 얼굴로, 걱정하는 목소리로, 늘 하던 말을 하고 지나갔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더 이상 온전히 하나로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이마를 짚던 밤, 싱거운 국을 나누던 낮, 말린 생선을 문 앞에 두고 가던 새벽, 하 노인의 문 앞을 스쳐 갔을지도 모를 어둠. 얼굴 위에 얼굴이 겹쳤다. 정든 얼굴 위에 모르는 얼굴이 얇게 포개졌다. 진소백은 그것을 밀어내려 했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사람을 그렇게 쉽게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의심은 말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칼끝처럼 번쩍이지 않았다. 독처럼 한순간에 퍼지지도 않았다. 젖은 옷자락의 냉기처럼 천천히 살에 스며들었다. 깨닫고 나면 이미 몸이 떨리고 있었다.

진소백은 하 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노인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등잔불은 낮게 흔들렸다. 약낭은 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안의 약들은 조용했다. 사람의 몸을 살피는 데 쓰이는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법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는 하 노인의 곁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다만 손이 흩어지면 마음까지 흩어질 것 같았다.

허봉일 리 없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허봉이면 안 된다.

그 생각은 믿음이 아니라 부탁에 가까웠다.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부탁. 하 노인에게, 어둠에게, 이 골목의 오래된 밥 냄새에게, 혹은 자신에게.

문밖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밤의 물길은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렀다. 그 소리 속에서 진소백은 허봉의 걸음을 다시 들었다. 낮고 익숙한, 이웃의 걸음.

그는 눈을 감았지만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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