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그림자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비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처마 끝의 공기는 젖은 천처럼 무거웠다. 의원 앞 흙길에는 아침부터 먼지가 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눌려 들렸고, 닭 우는 소리마저 어딘가 물에 잠긴 듯했다.
진소백은 문짝을 밀어 열고 마당을 쓸었다. 싸리비가 흙바닥을 스칠 때마다 가는 자국이 남았다가 금세 흐려졌다. 바람이 없는데도 대추나무 잎이 조금씩 뒤집혔다. 고진명은 안쪽 약장 앞에 앉아 말린 감초를 고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그런데 진소백은 손이 자꾸 늦어지는 것을 느꼈다. 솥에서 김이 올라오는데도 냄새가 진하지 않았다. 약재를 빻는 절구 소리도 두어 번 울리다 끊겼다. 고진명이 절굿공이를 내려놓고 창밖을 본 까닭이었다.
"비가 오겠습니다."
"오겠지."
그뿐이었다.
오전에는 늘 오던 사람들이 왔다. 허리가 굽은 장씨 노파가 무릎이 시리다며 앉았다 갔고, 방앗간 둘째가 손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 달라며 울상을 지었다. 진소백이 가시를 빼고 술로 닦는 동안 고진명은 곁에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오래가지 않았다.
점심 무렵, 처마 아래 공기가 어두워졌을 때였다.
의원 앞에 발소리가 멎었다. 진소백은 약종이를 접다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 선 그림자가 셋이었다. 키와 어깨가 서로 달랐지만, 세 사람 모두 같은 식으로 서 있었다. 발끝이 문턱을 향했고, 손은 소매 안에 감추거나 허리 곁에 붙어 있었다. 그들은 앓는 사람처럼 굽히지도, 급한 사람처럼 부르지도 않았다.
앞에 선 사내가 먼저 문턱을 넘었다. 뒤의 둘이 한 걸음 늦게 들어왔다. 방 안의 약 냄새가 잠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사내는 진소백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곧장 고진명에게 갔다.
"고 의원이시오?"
고진명은 천천히 손에 든 약재를 내려놓았다.
"그렇소."
사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리는 많이 굽히지 않았다.
"옛 물건을 받으러 왔소."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소백은 사내의 말을 속으로 다시 짚었다. 옛 물건. 병명도, 사람 이름도 아니었다. 빚을 독촉하는 말투도, 잃어버린 것을 찾는 초조함도 없었다.
고진명은 한 박자 뒤에 물었다.
"무슨 물건을 말하는 것이오?"
"고 의원이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그런 것은 모르오."
사내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만큼 작았다.
"모른다고 하실 일은 아니오."
진소백은 고진명의 손을 보았다. 약장 앞에 놓인, 마디가 굵고 늘 약 냄새가 배어 있는 손. 그 손의 둘째손가락이 감초 접시 가장자리를 한 번 눌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병자를 보고 약을 지어 주는 늙은 의원이오. 오래된 물건이라면 장터 골동품 가게를 찾아가 보시오."
뒤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방 안을 훑었다. 약장, 처방철이 꽂힌 선반, 벽에 걸린 침통, 오래된 궤짝, 진소백이 접어 둔 약종이. 그 시선은 물건 위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나 빠뜨리는 곳도 없었다. 진소백은 한 발 옆으로 움직였다. 그의 몸이 선반 일부를 가렸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앞의 사내가 그제야 진소백을 보았다.
"제자인가."
진소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 안쪽이 말랐다. 물을 마신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혀가 윗니 뒤에 붙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아이요."
고진명이 대신 말했다.
"오래 숨긴 물건은 주인을 바꾸기 마련이오. 고 의원께서 오래 붙들고 계실 이유가 없소."
고진명의 눈가가 아주 조금 접혔다. 평소 환자의 허튼 고집을 받아 줄 때 보이던 표정과 닮았지만 같지는 않았다.
"말이 지나치오."
"아직은 말뿐이오."
그 말이 방바닥에 놓였다. 세 사내는 칼을 뽑지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약탕관의 끓는 소리가 멀어졌다. 창밖 흙길에서 누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아가시오. 찾는 것이 무엇이든, 이 의원에는 없소."
"오늘은 그렇게 듣고 가겠소."
사내가 몸을 돌렸다. 뒤의 둘이 움직이는 사이, 한 사람이 선반에 꽂힌 낡은 처방철 쪽으로 눈을 주었다. 아주 짧았다. 진소백은 그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손때가 타서 모서리가 까맣고, 묶은 끈도 몇 번이나 갈아 맨 종이 묶음이었다.
세 사람은 들어올 때와 같은 간격으로 나갔다. 문턱을 넘은 뒤에도 앞의 사내가 한 번 돌아보았다.
"비가 오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시오."
고진명은 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멀어지는 발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발소리가 사라졌는데도 방 안에는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스승님. 방금 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모른다."
짧은 대답이었다.
진소백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고진명의 '모른다'를 많이 들어 보았다. 약초 이름을 묻는 아이에게 장난삼아 모른다 한 적도 있고, 환자가 헛소문을 들고 왔을 때 더 캐묻지 않으려 모른다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고진명의 목소리는 둥글었다. 끝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지금은 달랐다. 말은 낮았으나 끝이 접히지 않았다. 손은 감초를 집었으나 엄지와 검지가 맞물린 자리가 너무 희었다. 눈은 진소백을 보지 않고 솥 쪽을 향했다. 오래 같이 산 사람만 알 수 있는 어긋남이었다.
진소백은 다시 묻고 싶었다. 옛 물건이 무엇인지. 왜 그들이 스승을 찾아왔는지. 왜 낙양이라는 말에 멈칫했는지. 어젯밤 담장 밖의 그림자와 오늘 온 세 사람이 같은지. 말은 입안에서 부서졌다. 고진명은 답할 얼굴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솥 곁으로 가 불을 줄였다.
그날 오후, 의원을 찾는 사람은 적었다. 고진명은 평소보다 처방을 짧게 썼다. 붓끝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늦었다. 진소백은 약재를 빻으며 몇 번이나 스승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스승은 한 번도 처방철을 꺼내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이어졌고, 마당의 흙이 검게 젖었다. 진소백은 문을 닫고 빗장을 확인했다. 장작더미에 덮개를 씌우고, 약초 광주리를 안으로 들였다.
"소백아."
고진명이 안방 문가에 서 있었다. 그 부름이 낮았다. 진소백은 젖은 손을 옷자락에 닦고 다가갔다. 고진명은 한참 빗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어릴 때 나랑 같이 올라갔던 그 산길로 가라."
"산길이라면…… 뒷산 너머로 가던 길 말입니까? 왜 갑자기 그 말씀을 하십니까?"
고진명은 대답 대신 벽에 걸린 낡은 등잔을 내려 불을 붙였다. 불빛이 한 번 흔들리고 자리를 잡자, 스승의 주름이 깊어 보였다.
"개울을 만나면 오른쪽으로 붙어라. 바위가 둘로 갈라진 곳이 나온다. 거기서 위쪽 길이다."
"스승님.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게 무엇입니까?"
"그런 일이 없으면 된다."
"그럼 저는 왜 그 길을 알아야 합니까?"
고진명은 등잔을 탁자에 놓았다. 손끝이 불빛 가까이 갔다가 물러났다.
"알아 두어라.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
진소백은 가슴 안쪽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물어야 했다. 오늘 온 자들이 다시 오는지, 스승이 감춘 것이 있는지, 자신만 모르는 일이 의원 벽 안에 오래전부터 있었는지. 그러나 고진명의 입은 이미 닫혀 있었다. 평소 환자를 달랠 때처럼 말을 아끼는 침묵이 아니었다. 더 묻는다고 열릴 문이 아니었다.
"예."
"네 봇짐은 가볍게 꾸려 두어라."
진소백은 방으로 갔다. 낡은 보자기에 여벌 저고리와 마른 떡 두 조각, 작은 물통을 넣었다. 손이 자꾸 같은 물건을 집었다 놓았다. 그 산길은 어릴 때 몇 번 오른 길이었다. 스승의 손을 잡고, 숨이 차면 돌 위에 앉아 물을 마시던 길. 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 나무가 많았고, 어느 지점부터 마을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만 기억났다. 매듭이 한 번에 되지 않았다.
밤이 깊어졌다.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진소백은 자리에 누웠으나 눈을 감지 못했다. 한참 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마룻바닥이 울리지 않게 발을 디뎠다. 문틈으로 보이는 불빛이 흔들렸다.
고진명은 약장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낮에 사내 하나가 눈길을 주었던 낡은 처방철이 펼쳐져 있었다. 고진명은 끈을 풀고 오래된 종이들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손이 처방철 중간쯤에서 멈추더니, 여러 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얇은 종이 몇 장을 꺼냈다. 그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등잔 불빛은 스승의 어깨에 가려졌고, 종이는 곧 접혔다.
고진명은 처방철을 다시 묶었다. 매듭을 예전과 같은 자리로 돌려놓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런 뒤 접은 종이를 품에 넣고 일어나, 벽장 아래 오래된 나무함을 열었다. 접은 종이가 그 안으로 들어갔는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지 진소백은 알 수 없었다. 나무함이 닫혔다. 고진명은 등잔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진소백은 문틈 너머 그 등을 보았다. 평생 약재 냄새와 병자의 신음 사이를 오가던 작고 마른 등이, 오늘은 낯선 그림자처럼 보였다.
진소백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보자기 매듭 끝이 손가락에 닿았다. 그는 그것을 쥐었다 놓았다.
스승이 거짓말을 했다.
그 생각이 오랫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모른다고 했던 목소리, 감초 접시를 누르던 손가락, 처방철 갈피에서 꺼낸 종이, 산길로 가라던 말. 모든 것이 서로 맞물리지 않은 채 가슴 안에서 굴렀다.
그때 빗소리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굵던 빗줄기가 가늘어졌는지, 처마 끝 물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멀리서 개가 짖었다. 한 번. 잠시 뜸을 두고 또 한 번. 비 오는 밤이면 개 짖는 소리는 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짖는 소리 뒤에 다른 소리가 붙지 않았다.
개가 세 번째 짖으려다 말았다.
뚝.
그 짧은 끊김이 방 안까지 들어왔다. 진소백은 머리맡의 보자기를 잡았다. 손끝이 매듭을 놓쳤다. 그는 다시 잡고 문 쪽을 보았다.
빗소리가 멎어 있었다. 처마 끝 물방울도,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도, 마당의 물길도 모두 사라졌다. 의원 전체가 한꺼번에 숨을 참은 듯했다. 바깥 흙길에서 무언가가 문 앞에 섰다.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문 너머로 무게가 느껴졌다.
다음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의원의 낡은 문이 안쪽으로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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