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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 5/30

빈 그릇

등불은 새벽 직전의 숨처럼 작아져 있었다.

진소백은 부서진 문턱을 넘지 못하고 한 번 미끄러졌다. 손바닥에 나무 조각이 박혔으나,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기어 들어갔다. 방 안은 조금 전까지 사람이 서로 부딪치고 쇠가 긁히던 자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조용했다. 넘어간 탁자 밑에서 약첩 몇 장이 흩어져 있었고, 벽에 걸린 침통은 뚜껑이 열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스승님."

대답은 없었다.

고진명은 방 한가운데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등불이 닿는 쪽 얼굴만 희미하게 밝았고, 나머지는 바닥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진소백은 무릎으로 바닥을 밀며 다가갔다. 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허공에서 몇 번 멈췄다. 어깨를 잡으려다 손을 거두고, 팔을 받치려다 다시 놓쳤다. 그러다 겨우 고진명의 윗몸을 끌어안았다. 몸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스승님, 들리십니까. 저예요. 소백입니다."

고진명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소리라기보다 바람이 새는 기척이었다. 진소백은 귀를 낮췄다. 숨은 얕았고, 그 사이가 길었다. 방금까지 습격자들을 막아 서던 노인의 팔이 진소백의 무릎 위에서 힘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약……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진소백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고진명의 손가락이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 아주 약한 힘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잔기침 한 번에도 풀릴 만큼. 그런데 진소백은 움직이지 못했다.

"가지…… 마라."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한 글자씩 마른 종이를 접는 소리가 났다.

"안 됩니다. 상처를 봐야 합니다. 지혈부터—"

고진명은 고개를 아주 조금 저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숨이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진소백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방 안 어딘가에 부딪혀 떨어질 것 같았다.

꺼져 가는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문 없는 문간으로 새벽바람이 들어와 방 안의 약냄새와 재냄새를 천천히 섞었다. 진소백은 고진명의 등을 받친 팔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진소백도 알 수 없었다. 문밖으로 밀려나간 것 때문인지, 약재 가루를 더 빨리 뿌리지 못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때문인지. 말은 작게 나왔고, 곧 방 안의 조용함에 묻혔다.

고진명의 눈이 반쯤 떠졌다. 흐릿한 눈동자가 진소백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찾고 나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소백아."

"예."

"잘 들어라."

진소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세게 끄덕여 고진명의 어깨가 흔들릴까 봐 곧 멈췄다. 고진명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먼저 갔다가, 뒤늦게 말이 따라왔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 산길로 가서."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다음 숨이 오기까지 방 안의 모든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진소백은 고진명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무덤을 파거라."

진소백은 말을 알아들었으나, 뜻은 잡히지 않았다. 무덤이라는 말이 방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그는 묻고 싶었다. 어느 무덤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지금 무슨 일이 이미 생긴 것인지. 그러나 고진명의 숨이 너무 얇았다. 질문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스승님, 그 산길이라면……."

고진명의 손가락이 조금 오그라들었다. 대답 대신이었다. 진소백은 더 묻지 못했다.

바깥 어둠이 아주 천천히 옅어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으나, 문간의 부서진 나뭇결이 조금씩 드러났다. 밤이 물러가는데도 방 안은 밝아지지 않았다. 고진명이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진소백의 얼굴이 아니라 그 너머 어딘가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진소백은 몸을 낮췄다.

"무엇을 발견하든."

고진명의 숨이 길게 새었다. 말이 사라질까 봐 진소백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네 아버지라고는…… 믿지 마라."

그 말은 더 낮았다. 등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작아지는 빛처럼, 겨우 남아 진소백의 귀에 닿았다.

진소백은 그대로 굳었다. 아버지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그는 그 말을 입 안에서 되뇌지도 못했다. 고진명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무엇을 보았기에 믿지 말라는지, 그 모든 것이 문 밖의 새벽보다 멀었다.

"스승님. 무슨 뜻입니까. 제가 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진명의 목에서 잔기침 같은 소리가 났다. 진소백은 급히 몸을 바로 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손을 놓고 약장으로 가야 했다. 붕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혈에 쓰는 약가루는 오른쪽 둘째 칸에 있었다. 그는 수없이 봐 왔다. 고진명이 손님들을 치료할 때마다 옆에서 심부름을 했다. 손을 씻고, 천을 접고, 약을 달이고, 다친 사람의 팔을 잡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잠깐만요. 놓지 마십시오. 금방입니다."

진소백이 고진명의 손을 조심히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 손은 내려놓는 순간 다시 그의 손등을 잡았다. 힘이 없는데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뜻만은 분명했다. 진소백은 약장 쪽을 보았다. 넘어진 서랍에서 흰 천이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거리는 몇 걸음도 되지 않았다.

"스승님,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고진명은 눈을 감았다가 뜨지 못했다. 입술만 아주 조금 벌어졌다. 진소백은 귀를 기울였다. 말이 있을 줄 알았다. 아직 한 마디 더 남았을 줄 알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진소백은 한 손으로 고진명의 손을 쥔 채 다른 손을 뻗어 가까운 천 조각을 끌어왔다. 손끝에 닿지 않아 몸을 더 기울였다. 고진명의 머리가 그의 팔 안에서 조금 내려갔다. 진소백은 급히 다시 받쳤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그는 천을 접어 눌렀다. 제대로 누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약이 필요했다. 물도 필요했다. 그는 허둥대며 바닥에 떨어진 약봉지를 집었다가 이름을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다른 것을 집었다. 손이 떨려 봉지가 찢어졌다. 마른 가루가 바닥에 회색 먼지처럼 번졌다.

"이게 아닙니다. 이게 아닌데."

그때 고진명의 손이 진소백의 손을 다시 잡았다.

진소백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 손은 아주 따뜻하지도, 아주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방금 전보다 더 조용했다. 손가락이 그의 손등 위에 얹힌 채 더는 힘을 더하지 않았다. 진소백은 고진명의 얼굴을 보았다.

눈은 감겨 있었다.

처음에는 잠깐 숨을 고르는 줄 알았다. 긴 말을 한 뒤 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진명은 늘 그랬다. 기침이 심한 날에도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는 표시를 하고, 숨을 고른 뒤 다시 잔소리를 했다. 진소백은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지 않으려 했지만 머릿속에서 저절로 숫자가 생겼다.

넷.

다섯.

고진명의 목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진소백은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숨소리를 찾았다. 문밖의 바람 소리, 약탕기 아래 식어 가는 숯의 작은 소리, 자기 목 안에서 나는 거친 숨이 모두 방해가 되었다.

"스승님."

대답이 없었다. 진소백은 고진명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힘을 다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처럼 손을 감싸 쥐었다.

"스승님, 아직 안 됩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그는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소리가 갈라졌다.

"스승님."

고진명은 눈을 뜨지 않았다.

진소백은 한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팔이 저려 왔다. 무릎 밑의 바닥이 차가웠다. 등불은 끝내 심지 끝에서 작은 불씨만 남기고 꺼졌다. 방 안이 어두워지자, 문간의 새벽빛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는 고진명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지 못했다. 내려놓으면 정말 끝날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받치고 있었다. 어깨가 굳고 손목이 저렸다. 고진명의 손은 그의 손 안에서 무게만 남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바깥에서 먼 닭 울음이 한 번 들렸다. 그 소리에 진소백은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의 물건들이 천천히 제자리를 드러냈다. 부서진 문짝, 넘어간 의자, 흩어진 약첩, 바닥에 쏟아진 가루. 밤새 뒤집힌 것들은 모두 보였으나, 있어야 할 소리 하나가 없었다.

고진명의 기침 소리.

진소백은 그제야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고진명의 머리 밑에 접은 겉옷을 받쳤다. 손을 떼기까지 오래 걸렸다. 손이 떨어진 뒤에도 고진명의 손가락 자리가 손등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약장 앞으로 기어가듯 다가갔다. 둘째 칸을 열었다. 지혈약이 있었다. 붕대도 있었다.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평소 고진명이 늘 말하던 대로, 급할 때 손이 먼저 찾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진소백은 약가루 봉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제 쓰임이 늦었다는 것을 손이 먼저 알았다.

방 한쪽의 약탕기가 아직 미지근한 김을 내고 있었다. 밤에 달이던 약이었다. 누군가 불을 낮추지 않았는데도, 숯은 저 혼자 사그라지고 물은 저 혼자 끓다 잦아들고 있었다. 진소백은 그 소리를 들었다. 보글거리던 끝이 한 번 꺼지고, 다시 한 번 작게 올라왔다가, 마침내 잠잠해지는 소리.

그 소리가 이렇게 컸던 적이 있었나.

탁자 위에는 빈 그릇이 하나 엎어져 있었다. 고진명이 마시다 둔 물그릇인지, 진소백이 밤에 씻어 놓은 약그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는 그릇을 바로 세웠다. 바닥에 닿는 소리가 방 안을 돌아 다시 그에게 왔다. 그릇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빛이 들어와도 채워지는 것은 없었다.

진소백은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벽을 짚었다. 문간으로 다가가자 바깥이 보였다. 새벽빛이 마당의 돌을 낮은 색으로 밝히고 있었다. 댓돌 위에 신발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쪽 뒤축은 고쳐진 자리가 아직 어색하게 반듯했다. 고진명이 손가락으로 눌러 모양을 잡아 주던 모습이 아주 짧게 스쳤다. 그때는 신발이 낡았다고만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 낡은 가죽이 누군가의 손길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소백은 신발 앞에 섰다. 신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을 불러야 했고, 장례를 준비해야 했고, 고진명이 남긴 말을 기억해야 했다. 산길과 무덤, 아버지라는 단어가 서로 닿지 못한 채 머릿속에 따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발을 신지 못했다.

댓돌 아래에 발을 내려놓으면, 다시 이 방으로 돌아와도 고진명이 "늦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약탕기 앞에 앉아 불을 보라고 시키지도, 빈 그릇을 씻어 두라며 손짓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진소백은 문지방에 손을 얹고 오래 서 있었다. 등 뒤의 방에서는 식은 약냄새가 천천히 옅어졌고, 앞쪽 마당에서는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의원에는 아침이 왔으나, 그 아침을 맞아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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