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이라는 배
금속 서랍이 끝까지 빠지지 않고 턱에 걸렸다. 도경은 손목을 비틀어 낡은 손잡이를 다시 당겼다. 서랍 안쪽에서 마이크로필름 릴 두 개가 서로 부딪치며 얇은 소리를 냈다. 등록소 직원은 멀찍이서 “복제 금지 자료입니다”라고만 말했다.
도경은 대답하지 않고 장갑 낀 손끝으로 릴 번호를 맞췄다. 선박 등록 대장. 폐선, 개조, 임시 항행 허가, 연구 목적 장치 부속 목록. 오래된 종이 냄새와 금속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화면에 확대된 글자는 한 번씩 흔들렸다. 렌즈가 낡았거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락.
처음 검색한 이름은 공식명 목록에 없었다. 별칭 색인에도 없었다. 도경은 검색어를 지우고 아버지 기록에 붙어 있던 주변 단어를 넣었다. 심해 체류. 유인 모듈. 해저 검증. 지원선. 그러자 다른 이름 하나가 올라왔다. 공식명은 건조한 숫자와 기관 약자로 되어 있었다. 그 아래 괄호 안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현장 별칭: 나락.
도경은 화면을 멈췄다. 벽을 더 밀어붙이면 문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문서가 아니라 물건이 나왔다. 누가 부른 이름인지, 왜 그렇게 굳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별칭은 한 번만 나오지 않았다. 개조 승인서, 보험 예외 항목, 항행 제한 통보서 끝에 같은 괄호가 반복되었다.
“그 자료는 선박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직원이 다가와 낮게 말했다. 거절이라기보다 책임 회피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등록소 자료에 있으면 선박 아닙니까.”
“일부는 장비입니다. 일부는 부속 플랫폼이고요. 분류가 바뀐 적이 있습니다.”
도경은 다시 화면을 넘겼다. 선박 명세표의 빈칸마다 다른 부서 도장이 찍혀 있었다. 배로 등록됐다가 실험 장치로 넘어갔고, 다시 임시 항행 대상이 되었다.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락은 누군가의 비유가 아니었다. 사람이 타고, 바다 위에서 이동하고, 아래로 무언가를 내려보내기 위해 만든 실물이었다.
서도진의 마지막 기록에서 그 단어가 왜 흐릿하게 남았는지 조금 잡혔다. 아버지는 장소로 간 것이 아니라 장치에 탔다. 도경은 릴 번호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손가락 옆에 검은 분진이 묻었다. 지우지 않았다.
*
두 번째 릴은 구조도였다. 직원은 열람대 옆에 서서 팔짱을 꼈고, 도경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림은 설명보다 느렸지만 거짓말은 덜 했다.
지원선은 위에 있었다. 두꺼운 선 두 가닥이 아래로 내려갔다. 하나는 전력과 통신, 하나는 회수용 케이블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끝에 매달린 것은 단순한 잠수정이 아니었다. 둥근 유인 구획, 압력 균형실, 짧은 체류 모듈, 외부 샘플링 팔, 비상 부상 장치. 서로 다른 목적의 물건들이 한 몸처럼 묶여 있었다.
해저 거주 실험 플랫폼. 짧은 기간 동안 사람과 장비가 바닥 근처에 머물며, 음향·화학·퇴적 샘플을 동시에 얻기 위한 결합 장치.
도경은 그 문장을 입 밖으로 읽지 않았다. 대신 구조도 옆 여백의 운용 조건을 따라갔다. 최대 체류 시간, 교대 규정, 통신 지연 허용치, 압력 적응 절차. 실제로 내려가는 것은 잠수정만이 아니었다. 아래에 머무는 방, 사람을 다시 위로 끌어올리는 줄, 끊어졌을 때 떠오르도록 설계된 장치까지 한꺼번에 움직였다.
내려감.
고래 신호에서 그 말은 문턱처럼 들렸고, 해류는 번역하지 못한 채 주저했다. 도경은 이제 그 말이 은유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수심은 숫자가 아니라 절차였다. 닫히는 해치, 줄어드는 빛, 올라오는 압력, 위쪽 지원선과의 연결. 그리고 사람이 그 절차에 몸을 넣는 일.
아버지는 이 모듈과 함께 내려갔다.
문장을 떠올리자 손이 멈췄다. 도경은 수첩 모서리를 눌러 종이를 고정했다. 서도진이 마지막에 본 것이 고래였는지, 계기판이었는지, 물속의 검은 바닥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망은 오래된 컵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나. 왜 가족에게는 출장 일정처럼 남기고, 바다에는 이렇게 복잡한 장치를 남겼나.
도경은 곧장 다음 장을 넘겼다. 감정이 구조도를 대신 읽게 두면 안 됐다.
모듈 명세 아래에는 회수 절차가 있었다. 정상 회수, 지연 회수, 대기 모드, 통신 두절 시 연락 체계. 필요한 것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가 아니었다. 아직 그 질문은 자료가 없었다.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은 무엇을 타고 내려갔는가였다.
답은 충분히 선명했다. 나락은 선박도, 잠수정도, 실험실도 따로따로가 아니었다. 위의 배와 아래의 방을 줄과 규정으로 묶어 둔 결합 플랫폼이었다.
도경은 구조도 위에 투명 필름을 올리고 필요한 부분만 따라 그렸다. 유인 구획. 체류 모듈. 상승 케이블. 지원선. 마지막에 별칭을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 이름은 이미 충분히 따라붙어 있었다.
*
마지막 위치 항목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처음엔 필름 손상인 줄 알았다. 도경은 초점을 조절하고 배율을 낮췄다. 손상이 아니었다. 일정한 사각형으로 덮인 열람 제한 표시였다. 그 아래에는 항행 종료 보고서가 이어졌고, 결정적인 칸만 비어 있었다.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직원이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뒤쪽의 잠금 캐비닛을 보더니, 다시 도경의 신분증을 보았다.
“열람 권한 밖입니다.”
“사고 조사 관련입니다.”
“그 문구로는 안 열립니다.”
도경은 신분증을 회수하지 않았다. 플라스틱 카드가 금속 카운터 위에서 차갑게 식었다.
“어떤 문구면 열립니까.”
“좌표 봉인 자료는 별도 해제 요청이 필요합니다. 가족 관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족 관계. 그 말이 카운터 위에 딱딱하게 놓였다. 도경은 카드를 집어 들었다. 여기서 서도진의 딸이라는 사실은 문을 열지 못했다. 때로는 그 사실이 발목만 잡았다. 이름을 대면 사람들은 조심했고, 조심하는 사람들은 자료를 더 잘 잠갔다.
“해제 열쇠가 있다는 뜻입니까.”
직원은 서류철을 넘기는 척했다. 도경은 그 움직임을 기다렸다. 대답을 피하는 동안에도 사람은 필요한 방향으로 눈을 준다.
“구자료라면 첨부 인계 기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등록소에는 없을 수도 있고요.”
“인계받은 쪽은요.”
“그건 제가 말할 수 없습니다.”
도경은 웃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는 말은 없다는 말과 달랐다. 봉인은 실수로 남은 검은 칸이 아니었다. 해제 절차가 있고, 절차를 움직이는 첨부물이 있었다. 좌표 자체는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좌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추정이 아니었다.
도경은 열람대의 반납 버튼을 눌렀다. 필름이 감기며 얇은 마찰음을 냈다. 직원이 안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도경은 수첩을 닫기 전 마지막 줄을 적었다.
마지막 위치 봉인. 별도 인계 기록 필요.
그 아래에 더 쓰려다 멈췄다. 조급함은 문장을 길게 만든다. 긴 문장은 사실과 바람을 섞는다. 도경은 펜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록소 출입문은 무거웠다. 밀고 나가자 손바닥에 차가운 금속 냄새가 남았다. 밖의 소음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트럭 후진음, 갈매기 소리, 멀리서 부딪치는 컨테이너의 낮은 울림.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부두가 가까웠다.
좌표는 잠겨 있었다. 그러나 잠긴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
저녁 부두의 조명은 물 위에서 길게 찢어졌다. 도경은 등록소 맞은편 창고 벽에 기대어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하리시에게 보낼 문장은 아직 만들지 않았다. 지금 가진 것은 실체와 봉인뿐이었다. 좌표는 없고, 이유는 더 없었다.
검은 밴 한 대가 창고 뒤쪽에 섰다. 문에는 세이렌 컨소시엄의 표식이 작게 붙어 있었다. 너무 작아서 숨긴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내려 등록소 쪽으로 걸었다. 한 명은 태블릿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오래된 서류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도경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거슬렸다. 오래전 사고의 뒷정리를 하러 온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필요한 위치를 알고, 필요한 창구로 가는 사람들의 걸음이었다. 세이렌이 지금 같은 좌표를 추적하고 있었다. 20년 전의 책임을 묻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쓸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움직임이었다.
도경은 밴 번호를 적지 않았다. 증거가 아니라 관찰이었다. 관찰을 증거처럼 굳히면 다음 판단이 틀어진다. 대신 들어간 시간과 들고 있던 봉투의 색, 태블릿 케이스의 깨진 모서리를 적었다. 확인 가능한 것만.
휴대폰 화면에 어머니 이름이 떠 있었다. 오전에 온 부재중 전화였다. 윤서란은 짧은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다. 늘 그랬다. 말이 남으면 나중에 다시 읽힌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어머니는 중요한 일일수록 음성도 글도 아꼈다.
도경은 전화를 걸지 못하고 화면을 껐다. 어머니 집 장롱 아래 칸. 낡은 방수 파우치. 서도진이 마지막 출항 전 맡겼다는 물건들. 도경은 몇 번이나 그 파우치를 떠올렸고, 몇 번이나 열지 않았다. 아버지의 물건을 뒤지는 일은 조사와 도굴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 경계가 창피해서 더 오래 미뤘다.
세이렌 직원들이 등록소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며 유리에 비친 부두 조명이 잘렸다. 도경은 숨을 천천히 내쉬고, 휴대폰을 다시 켰다.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문자를 썼다.
`아버지 유품 중 항해 서류나 작은 금속 키가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오늘 밤 갈게요.`
보내기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요구였다. 설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명을 덧붙이면 거짓말이 늘어날 것 같았다. 도경은 그대로 보냈다.
곧바로 답은 오지 않았다. 도경은 방수 케이스 안쪽에 넣어 둔 보조 키를 떠올렸다. 그것과 다른 열쇠. 등록소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해제의 조각. 어머니가 보관한 유품이 봉인된 좌표에 닿을 수 있다면, 다음 목적지는 바다가 아니라 집이었다.
밴의 엔진은 꺼진 채였다. 세이렌은 기다릴 생각이었다. 도경도 움직여야 했다. 오늘 하나는 분명해졌다. 나락은 해저 체류 플랫폼의 별칭이다. 남은 질문도 하나였다. 서도진은 왜 그것과 함께 남았나.
도경은 부두를 빠져나오며 어머니의 답장을 기다렸다. 화면은 어두웠고, 좌표는 아직 검은 칸 뒤에 있었다.
이 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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