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실마리
새벽 나루 쪽에서 쇠고리가 말뚝을 긁는 소리가 산 위까지 올라왔다.
진소백은 무덤 곁에 웅크린 채 그 소리를 들었다. 밤새 파헤쳤다 덮은 흙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듯 거칠었다. 삽자국을 손으로 문질러 눌렀지만, 눈 밝은 자라면 누군가 이곳에 손댄 것을 알아볼 터였다.
관 속에서 나온 것들은 다시 보지 않았다. 봇짐 깊은 곳에 따로 싸 두었다. 부러진 검, 비녀, 그리고 이름들이 빽빽한 명단. 그 안에서 보았던 믿기 어려운 두 글자와 옆에 찍힌 已의 자국은 눈꺼풀 안쪽에 붙은 먼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펼친 것은 고진명 스승님의 유품이었다. 의원 벽장 아래 나무함에서 챙겨 온 낡은 편지와 기록 몇 장. 손때 묻은 종이는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어떤 곳은 오래 눌려 있던 탓에 글자가 종이결 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그는 헝겊을 풀어 무릎 위에 하나씩 폈다.
처음 훑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새벽빛 아래서 튀어나왔다.
수향(水鄕).
짧은 두 글자였다. 그 뒤의 먹은 번졌고, 아래 줄은 칼로 긁어낸 것처럼 끊겨 있었다. 진소백은 손끝으로 그 옆을 짚었다. 하 노인. 글씨가 성긴데도 그 세 글자만은 이상하게 살아 있었다.
다른 장에도 있었다. 한 편지의 접힌 등 안쪽에 수향이 숨어 있었고, 오래된 기록 끝에는 하 노인이라는 말이 다시 나왔다. 누가 보아도 한 번 스친 지명이 아니었다. 고진명 스승님은 그곳을 잊지 않으려 했다. 혹은 잊지 못했다.
진소백은 더 오래 헤아리지 않았다. 의원이 환자의 맥을 잡을 때 모든 병명을 한꺼번에 붙들 수는 없다. 먼저 뛰는 곳부터 본다. 지금 뛰는 곳은 수향이었다.
그때 산길 아래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진소백은 종이를 접던 손을 멈췄다. 이슬 젖은 풀을 밟는 소리였다. 짐승의 발은 아니었다. 사람은 길을 고르느라 한 박자씩 숨을 쉰다. 소리는 봉분 아래 나무들 사이에서 한 번, 두 번 가까워지더니 뚝 끊겼다.
“누구요?”
대답은 없었다.
바람이 숲을 훑었다.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며 짧게 수군거렸다. 진소백은 종이를 품 안쪽에 넣고 봇짐 끈을 당겨 묶었다. 그제야 무덤가 돌틈에 꽂혀 있던 작은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에는 없었다.
썩은 대나무 조각만 한 것이었다. 끝에 붉은 실 한 가닥이 매여 있었다. 봉문을 막는 부적도, 마을에서 쓰는 금줄도 아니었다. 강호 사람들이 길목에 남기는 표식은 저마다 달랐다. 약방에 누워 있던 무인들이 술김에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추적하는 자는 길을 남기고, 쫓기는 자는 길을 지운다고.
그는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독 묻은 침을 함부로 뽑지 않듯, 뜻 모를 것은 먼저 살폈다. 붉은 실은 젖어 있지 않았다. 방금 매인 것이었다.
진소백은 봉분 앞에 절했다. 이곳이 고진명 스승님의 무덤인지, 누군가가 만든 빈 껍데기인지 이제는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절은 해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고진명 스승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물러날 길이 조금 더 좁아졌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미끄러웠다. 그는 뛰지 않았다. 뛰면 뒤에 붙은 것이 정말 있다고 인정하는 꼴이었고, 산길에서 넘어져 발목을 상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약재를 다룰 때처럼 호흡을 일정하게 두고 내려갔다. 나뭇가지가 옷자락을 붙잡고, 풀잎의 물방울이 신발코를 때렸다.
중턱을 지나자 물 냄새가 올라왔다. 강가의 진흙, 젖은 밧줄, 오래된 생선 비늘 같은 냄새. 산의 흙냄새와 달랐다. 밑바닥에서 사람들의 욕심이 함께 끓는 냄새였다.
나루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있었다. 낡은 말뚝 세 개에 배 한 척이 묶여 있었고, 그 옆에서 사공이 삿대로 바닥을 긁고 있었다. 짐을 진 장정 둘은 서로 말없이 서 있었고, 보따리를 인 노파는 강 건너를 바라보다가 진소백을 힐끗 보았다. 그 눈길이 봇짐에서 약낭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사공은 진소백의 옷차림을 먼저 훑었다. 의원들이 쓰는 약낭을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건너가오?”
“수향까지 갑니까?”
사공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수향?”
옆에 있던 장정 하나가 낮게 웃었다. “젊은 의원 양반, 처음 가나 보오. 요즘 수향 물길은 괜히 묻고 타는 데가 아니오.”
“왜 그렇습니까?”
“곽서 쪽 사람들이 배삯을 두 번 받는다는 말이 있소. 나루에서 한 번, 물목에서 한 번. 돈 없으면 짐을 뜯고, 말 많으면 물에 처박는다지.”
사공이 삿대를 세워 장정 쪽을 찔렀다. “입 가벼운 놈은 물길에서 오래 못 산다.”
장정은 어깨를 움츠렸으나 웃음은 거두지 않았다. “내가 없는 말을 했나? 수향 위아래로 곽서 패거리 눈이 박혀 있는 건 강가 애들도 아는 일인데.”
곽서.
진소백은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한번 굴렸다. 근래 여러 번 들었다. 장사꾼 입에서, 객잔 부엌에서, 다친 무인의 헛소리 속에서. 강가의 물목을 쥐고 삯과 길을 재는 자. 사람들은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았다. 크게 부르면 들을 귀가 있다고 믿는 듯했다.
사공은 손을 내밀었다. “끝까지 가려면 삯은 더 내야 하오. 그리고 묻지 말아야 할 건 묻지 않는 게 좋소.”
진소백은 품에서 동전을 꺼냈다. 사공은 젖은 손으로 받아 손톱 위에 튕겨 보고, 소리를 들은 뒤 허리춤 주머니에 넣었다.
“앉으시오. 약낭은 품에 붙이고. 강 위에는 아픈 사람보다 아픈 척하는 놈이 더 많소.”
진소백은 배에 올랐다. 널빤지는 물을 먹어 미끄러웠다. 그는 가장자리 쪽에 앉아 봇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끈을 손가락으로 감았다. 봇짐 속 유품이 단단히 눌렸다. 무기가 아니라 남겨진 것들. 그 무게가 무릎을 낮췄다.
뒤늦게 한 사람이 배에 올랐다. 회색 치맛자락이 젖은 널 위를 스쳤고, 머리에 두른 천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얼굴은 그림자와 천에 가려 분명치 않았다. 여인은 뱃머리 쪽에 앉으며 짧게 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까?”
사공이 밧줄을 풀며 답했다. “늦은 사람은 배를 놓친 사람이오. 앉았으면 늦지 않았지.”
여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진소백은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낯선 배에서 남을 오래 보는 일은 시비의 씨앗이 된다. 약한 자일수록 눈길 하나도 아껴야 했다.
배가 물을 탔다. 말뚝에 걸린 밧줄이 풀리고, 나루가 조금씩 뒤로 밀렸다. 산비탈은 낮아지고, 강가의 버드나무 그림자가 물살에 끊겨 흘렀다. 진소백은 품 안쪽 종이를 한 번 눌렀다. 수향. 하 노인. 두 말은 이제 종이 위 글자가 아니라 물길 끝에 걸린 문처럼 느껴졌다.
장정 둘은 짐 위에 팔을 얹고 낮게 말을 주고받았다.
“물목에서 또 세울까?”
“곽서 놈들이 기분 좋으면 그냥 보내겠지.”
“그런 날이 있나?”
노파가 혀를 찼다. “강호 놈들은 칼만 들면 다 자기 땅인 줄 알아. 땅도 없는 것들이 물까지 팔아먹으려 들어.”
사공이 피식 웃었다. “할멈, 그 말은 배 안에서나 하시오. 수향 가까워지면 혀도 보따리 안에 넣어 두고.”
노파는 입술을 다물었다. 배 안 공기가 잠깐 가라앉았다. 진소백은 그 침묵에서 강호의 법을 보았다. 관아의 문서가 닿지 않는 물길에서는 노를 쥔 자, 돈을 쥔 자, 사람을 물에 넣을 수 있는 자가 법이었다.
그때 맞은편 장정의 시선이 진소백의 약낭에 오래 머물렀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장정은 졸린 척 고개를 숙였다가도 다시 약낭을 보았다. 이어 봇짐으로, 봇짐 매듭으로, 진소백의 손가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의원 양반.” 장정이 말을 걸었다. “약 좀 있소?”
진소백은 그를 보았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배를 타면 속이 뒤집혀서.”
말과 달리 얼굴빛은 멀쩡했다. 입술도 마르지 않았고, 목울대의 움직임도 고르다. 진소백은 약낭을 열지 않았다.
“생강을 씹는 게 낫습니다. 지금 드릴 약은 없습니다.”
장정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의원이 약이 없다?”
“환자에게 맞지 않는 약은 독과 같습니다.”
사공이 노를 젓다 말고 툭 던졌다. “그만하오. 배 위에서 남의 짐 넘보면 손가락 값이 더 비싸오.”
장정은 어깨를 으쓱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눈은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진소백은 약낭 끈을 다시 묶었다. 안에는 흔한 지혈산과 침통, 말린 약초가 전부였지만, 남이 보는 것은 약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의원의 짐에는 돈이 없다는 것을 강호 사람도 안다. 대신 비밀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뱃머리 쪽 여인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 천 끝 아래로 드러난 턱선이 한순간 보였다가 다시 가려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은 넓어졌다. 물살은 겉으로 잔잔했으나 배 밑을 밀어 올리는 힘이 있었다. 사공은 노를 바꾸어 잡을 때마다 강바닥을 보듯 눈을 낮췄다. 멀리 갈대밭 사이로 작은 배 두 척이 보였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쪽에서 누가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소백은 산에서 느꼈던 발소리를 떠올렸다. 무덤가의 붉은 실. 수향이 적힌 종이. 빈 관. 이름들이 빽빽한 명단.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것들이 몸 안에서 따로따로 뛰었다. 의원이라면 이런 맥을 싫어한다. 한 줄기로 잡히지 않는 맥은 병이 깊거나, 아직 병명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수향까지 가는 사람들은 밤길 조심하시오.”
사공이 불쑥 말했다. 노 끝에서 물방울이 흩어졌다.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왜 또? 세금 받는 놈들이 늘었나?”
“그거면 돈 내고 지나가면 되지.”
장정 하나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오?”
사공은 강가 갈대밭을 한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못 들었소? 그쪽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더라.”
배 안의 숨이 조금 늦어졌다.
“병이오?” 진소백이 물었다.
사공은 그를 힐끗 보았다. “의원 양반 귀에는 다 병으로 들리나 보오.”
“물가에서 죽었다면 독이나 역병일 수도 있습니다.”
“병이면 차라리 낫지.” 사공은 노를 깊게 밀었다. “건져 올리면 몸은 멀쩡한데 숨만 없다는 말도 있고,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말도 있소. 술집에서는 밤마다 물 밑에서 손이 올라온다 떠들고, 포구의 짐꾼들은 곽서 놈들이 입막음한다 하지. 뭐가 맞는지는 나도 모르오.”
노파가 보따리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럼 왜 배를 띄워?”
“먹고살아야 하니까.” 사공의 대답은 짧았다. “강호가 사람 죽인다고 밥솥이 알아서 차오르나.”
장정들은 더 떠들지 않았다. 약낭을 보던 자도 시선을 강으로 돌렸다. 배는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나루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산은 안개 뒤로 접혔다.
진소백은 품속 종이를 눌렀다. 수향이라는 글자가 손바닥 아래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보지 않았다. 지금 꺼내면 배 안 모든 눈이 그 종이를 볼 것이다. 대신 숨을 고르고, 머릿속에서 하나씩 접었다. 고진명 스승님의 기록. 하 노인. 붉은 실. 곽서의 물길. 죽어 나간다는 사람들.
답을 만들지는 않았다. 아직 상처를 열어 보지도 않았는데 병명을 외치는 의원은 돌팔이다.
다만 수향에 닿아야 했다.
노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강으로 돌아갔다. 배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아래로 미끄러졌고, 진소백은 무릎 위 봇짐을 조금 더 단단히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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