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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 8/30

빈 관

해질녘의 빛이 이름 없는 비석을 비껴 갈 때, 관 뚜껑은 진소백의 손끝 아래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오래 젖었다가 말라붙은 나무는 쉬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널빤지 사이에 낀 흙이 바스러지고, 못이 썩은 자리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났다. 진소백은 한쪽 무릎을 흙무더기에 박고 어깨로 힘을 보탰다. 손바닥에 흙알이 박혔고, 팔꿈치 아래까지 묻은 진흙은 식은땀에 엉겨 붙었다.

관 뚜껑이 한 치 더 벌어졌다.

그는 숨을 멈추었다. 죽은 이가 오래 누운 곳이라면 냄새가 먼저 올라올 터였다. 썩은 천, 젖은 뼈, 산짐승이 파고든 굴의 비릿함. 의원 일을 거들며 그는 죽어 가는 몸의 냄새를 몇 번 맡아 본 적이 있었다. 산중 객잔에서 칼 맞은 표객이 밤새 피를 토하다 숨이 끊겼을 때도, 약방 뒷방에 옮겨진 노인의 맥이 새벽녘 끊겼을 때도, 죽음은 늘 몸보다 먼저 냄새로 손을 들었다.

그러나 관 틈에서 올라온 것은 썩음이 아니었다.

마른 냄새였다. 오래 비워 둔 약재 궤짝, 향을 피우다 만 사당,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나무 방의 냄새. 지나치게 말라 있었다.

진소백은 이를 악물고 다시 밀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비스듬히 벗겨져 옆으로 내려앉았다. 파헤친 흙더미가 무너지고, 관 속으로 산바람이 쓸려 들어갔다. 비석 앞면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 비어 있음이 등 뒤에서 지켜보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진소백은 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신이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지 못했다.

관 속에는 누워 있어야 할 형체가 없었다. 뼈도, 수의도, 머리맡에 괴었을 베개도 없었다. 오래 몸이 닿았다면 남았을 움푹한 자리조차 없었다. 어두운 나무 바닥 위로 먼지만 얇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 하나 들어가 휘저은 흔적도, 벌레가 우글거리며 남긴 찌꺼기도 없었다.

빈 관이었다.

혹시 내 아버지의 무덤인가.

그 생각이 한 번 목구멍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고진명은 끝내 아버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죽기 전, 끊어지는 숨 사이로 이 산길과 빈 비석을 가리켰다. 진소백은 그 말 하나를 붙잡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관은 비어 있었다. 이름도 없고 몸도 없고, 묻힌 이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는 관 모서리를 붙잡았다. 나무는 차갑지 않았다. 마른 먼지가 손가락에 묻었다. 무덤이라면 죽은 이를 숨겨야 한다. 관이라면 마지막 몸 하나는 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 대신 무엇을 숨긴 채 기다린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산 아래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진소백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았다. 무덤가로 오르는 산길은 좁았다. 해가 기울며 잡목 사이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금 전 길목에서 보았던 이상한 흙자국이 다시 떠올랐다. 누군가 발자국을 지운 흔적. 산짐승이 밟고 지난 것과 달랐다. 발뒤꿈치 자리가 있어야 할 곳에 솔잎이 얇게 쓸려 있었고, 흙은 손바닥으로 문지른 듯 고르게 눌려 있었다.

강호의 길을 많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의원집 문턱에는 별별 발이 드나들었다. 술에 취한 낭인, 표국의 호위, 패도방의 하급 무사, 객잔 싸움에서 팔이 부러진 칼잡이. 그들은 늘 발을 숨기지 못했다. 무공을 모르는 이는 질질 끌고, 도망친 이는 앞꿈치가 깊고, 사람을 쫓던 이는 흙을 짓누른다. 그런데 이 산길의 흔적은 반대로 흙을 없애려 한 자의 것이었다.

빈 관 앞에서야 그 흔적이 뒤늦게 날카로워졌다.

진소백은 봇짐 끈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약낭은 허리에 있었고, 짧은 침통도 그대로였다. 사람을 해칠 물건은 없었다. 독초 몇 가지와 지혈약, 상처를 닫는 실, 고진명이 남긴 낡은 물건들뿐이었다. 이 산에서 누군가 나타난다면, 그는 싸울 방법이 아니라 숨을 살릴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관 속 어둠에 눈이 익자, 바닥 오른쪽에 낮게 가라앉은 물체가 보였다.

나무 조각처럼 보였으나, 관의 결과 맞지 않았다. 빛을 받는 각도가 달랐다. 진소백은 바로 손을 넣지 않았다. 먼저 관의 가장자리를 따라 손끝으로 먼지를 밀어 보았다. 함정 같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진명이 의원에게 늘 가르친 버릇이 있었다. 상처를 보기 전 손을 대지 말라. 피의 길, 살의 벌어진 방향, 독이 번진 빛을 먼저 보라.

그는 그렇게 관을 살폈다.

나무 바닥 한쪽에는 둥글게 눌린 자국이 있었다. 오래 물건이 놓여 있던 자리였다. 그 옆의 먼지는 조금 덜 쌓여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만졌는지, 아니면 관을 닫기 전부터 그렇게 놓였는지 알 수 없었다. 진소백은 손끝의 흙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은 뒤 조심스럽게 물체의 옆면을 밀었다.

쇠였다.

마른 나무가 아니라 식은 쇠의 감촉이 손끝을 눌렀다. 그는 그것을 움켜쥐지 않고, 아래에서 받치듯 들어 올렸다. 먼지가 떨어지고 어둠 속에서 끊어진 날이 드러났다.

부러진 검이었다.

진소백은 숨을 낮게 삼켰다.

그가 아는 검은 많지 않았다. 장터에서 장정들이 차고 다니는 싸구려 칼, 객잔 벽에 걸린 장식용 검, 표사들이 기름칠하며 으스대던 넓은 도. 그러나 손끝 위의 쇠붙이는 그런 물건들과 달랐다. 화려하지 않았다. 매끈한 명검도 아니었다. 도리어 쓰임이 끝난 쇠처럼 검고 묵직했다.

날은 중간쯤에서 끊겨 있었다. 파손면은 돌에 찍혀 부러진 모양이 아니었다. 진소백은 검흔을 잘 몰랐으나, 무인들이 술김에 떠들던 말은 기억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면 결이 선다, 도끼에 맞으면 이가 벌어진다, 내공으로 꺾이면 쇠가 안쪽으로 운다. 그 말들이 얼마나 허풍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부러진 면은 그 어느 쪽으로도 선뜻 들어맞지 않았다.

부러진 끝은 험한데, 억지로 비틀어 끊은 자국처럼 한쪽만 눌려 있었다. 검신에 남은 검은 얼룩은 녹인지 오래된 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진소백은 코 가까이 가져가지 않았다. 죽은 피와 녹슨 쇠는 의원에게도 헷갈리는 냄새를 낸다. 섣불리 맡아 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잡이는 더 이상했다.

그는 손잡이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보통 무사들이 말하던 손맛과는 먼 모양이었다. 넓고 낯설었다. 장터 칼처럼 거칠게 감은 가죽도 아니고, 귀한 장식검처럼 금실을 감지도 않았다. 닳은 자리가 깊었다. 누군가 오래 지녔던 물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관 속에 시신은 없고, 그 자리에 부러진 검이 있었다.

산중 빈 비석 아래에 검을 묻는다면 그건 무덤인가, 아니면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의절의 표시인가. 패한 자의 물건을 관에 넣어 모욕하는 일도 있다 했다. 반대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을 때 유품만 묻기도 한다 했다. 의원집을 찾아온 늙은 표사는 그런 일을 두고 “강호에서는 몸보다 이름이 먼저 죽는 법”이라 웃었었다.

그 웃음이 지금은 산바람보다 서늘하게 떠올랐다.

진소백은 부러진 검을 관 밖 흙 위에 바로 놓지 않았다. 흙이 젖어 있지는 않았지만, 무덤 속 물건을 함부로 굴리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벗겨진 관 뚜껑 안쪽의 평평한 부분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쇠가 나무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때였다.

부러진 검이 놓여 있던 자리 옆, 먼지 아래에 희게 가느다란 것이 드러났다. 조금 전에는 검신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진소백은 몸을 더 숙였다. 흰 것은 관 바닥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사람 뼈라면 너무 곧았고, 나무라면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그 위치가 마음에 걸렸다.

검 옆이 아니었다. 검의 그늘 아래 숨듯, 관 벽과 바닥이 맞닿는 좁은 틈에 밀려 있었다. 누군가 두 물건을 나란히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는 보이게 두고 하나는 가리려 한 듯했다. 아니면 관이 옮겨지거나 기울며 밀려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진소백은 관 모서리의 먼지를 살폈다. 흰 물건이 밀린 자국은 있었다. 아주 가늘고 긴 선 하나가 먼지 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 두 개로 그것의 가운데를 가볍게 집었다.

백옥 비녀였다.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지만, 살짝 닦인 자리 아래로 흐린 흰빛이 살아났다. 해가 낮아 관 안까지 그늘이 찼는데도 옥은 제 속의 빛을 조금 품고 있었다. 값싼 물건은 아니었다. 낙양 큰길의 장신구 가게 앞을 지나며 본 기름진 옥들과는 달랐으나, 허름한 산골 여인이 꽂을 비녀도 아니었다.

검 다음에 비녀.

진소백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짐작은 또 한 번 자리를 잃었다. 남자의 무덤이라 생각하려던 마음도, 싸움 끝에 남은 무인의 유품이라 여기려던 생각도 비녀 하나 앞에서 흐트러졌다. 그러나 비녀가 있다고 여인의 관이라 단정할 수도 없었다. 강호의 물건은 주인과 늘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자의 물건이 산 자의 손에 넘어가고, 산 자가 품은 물건이 죽은 이의 관 속에 들어간다. 약방에 맡겨진 유품들만 해도 그랬다. 주인 없는 칼집, 여인의 향낭, 어린아이의 목패가 한 봉지 안에 섞여 오는 일이 있었다.

비녀 끝 가까이에 작은 흠이 있었다.

진소백은 손톱으로 긁지 않았다. 옥은 보기보다 잘 상한다. 그는 엄지 끝으로 먼지만 밀어냈다. 흠은 흙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선 두 개가 비스듬히 엇갈려 있었다. 낙서 같기도 했고, 오래전 어디엔가 부딪혀 난 상처 같기도 했다. 그 선을 보자 그는 이상하게 입술이 말랐다. 누군가가 이 비녀를 손에 쥐고 망설였을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리에 꽂힌 물건이 아니라, 손 안에서 오래 굴려진 물건의 흠처럼 보였다.

그는 비녀를 검과 떨어진 곳에 내려놓았다. 관 뚜껑 안쪽, 나무가 덜 썩은 자리였다. 옥이 닿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진소백은 어깨가 굳었다. 산은 조용했으나, 조용해서 더 작은 소리까지 멀리 갈 것 같았다.

해가 더 내려갔다.

비석의 빈 앞면이 잿빛으로 변했고, 파헤친 흙더미 위로 그림자가 길어졌다. 산길을 내려가려면 지금 움직여야 했다. 어둠이 깊어지면 발을 헛디딜 뿐 아니라, 산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벌어진다. 무공을 모르는 진소백에게 밤 산은 적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길목의 발자국은 누군가 이곳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관을 다시 보았다.

부러진 검과 백옥 비녀를 들어낸 바닥은 이제 비어 보여야 했다. 그러나 먼지는 사람을 속였다. 한 겹 쌓인 먼지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감춘다. 의원이 부스럼을 째기 전 살빛을 다시 보는 것처럼, 진소백은 관 바닥을 천천히 훑었다.

비녀가 밀려 있던 틈 아래, 나무 결과 다른 얇은 가장자리가 있었다.

그는 숨을 낮추었다. 손끝으로 밀자 가장자리가 아주 조금 들렸다. 바닥이 벗겨진 것이 아니었다. 오래 마른 무엇인가가 먼지와 눌려 붙어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듯 꺼칠했다.

종이였다.

검과 비녀를 보았을 때와 다른 긴장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검은 말하지 않는 쇠였고, 비녀는 주인을 잃은 옥이었다. 종이는 달랐다. 종이는 누군가 말을 남기려고 접어 두는 물건이었다. 빈 관이 처음으로 입술을 가진 듯했다.

진소백은 곧장 집어 올리지 않았다.

오래된 종이는 사람의 살보다 약할 때가 있다. 약방에서 십 년 묵은 처방전을 펼치다 글자와 함께 바스러진 일을 그는 기억했다. 고진명은 그런 때마다 꾸짖지 않고 손을 잡아 주었다. “급한 손은 약도 독으로 만든다.” 그 말은 침을 놓을 때도, 상처를 닫을 때도, 죽은 이의 옷자락을 펼칠 때도 같았다.

진소백은 손가락 끝의 흙을 옷자락에 닦았다. 그래도 흙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약낭에서 깨끗한 포를 꺼내 손끝에 감았다. 포는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고, 낮 동안 흘린 땀으로 조금 눅눅했다. 그래도 맨손보다는 나았다.

종이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접혀 있었다.

네 귀가 안쪽으로 들어간 방식이 낯익었다. 고진명이 약재를 싸던 접기였다. 바람이 불어도 쉽게 풀리지 않고, 끈이 없어도 속이 쏟아지지 않는 접음. 약방에 들른 환자들은 대개 아무렇게나 구겨 품에 넣었지만, 고진명의 손을 거친 종이는 늘 같은 모양으로 닫혀 있었다. 진소백은 그 접힘을 보자 심장이 한 번 무겁게 뛰었다.

고진명이 이 종이를 접었는가.

그는 그 물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산이 너무 조용했다. 말이 나오면 누군가 대답할 것만 같았다.

종이 가장자리에는 누런 얼룩이 있었다. 피처럼 검붉지 않았다. 약재를 달이다 튄 물이 오래 말라붙은 빛에 가까웠다. 황련이나 감초의 달임물처럼 옅은 갈색. 그러나 그 역시 단정할 수 없었다. 오래된 얼룩은 제 이름을 잃는다. 진소백은 얼룩을 문지르지 않고 포 끝으로 살짝 받쳤다.

종이 겉면 한쪽에 검은 획이 보였다.

글자 전체가 아니라 한 획뿐이었다. 먼지와 접힌 주름 사이에서 굽은 꼬리만 드러나 있었다. 마치 ‘已’의 끝처럼 보였다가, 빛이 흔들리자 그저 먹이 번진 자국처럼도 보였다. 진소백은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보려면 펼쳐야 했다.

그 순간 산길 아래에서 돌 하나가 굴렀다.

작은 소리였다. 짐승이 밟아도 날 수 있는, 바람에 마른 가지가 떨어져도 생길 수 있는 소리. 그러나 진소백은 몸을 낮췄다. 약낭 끈이 손목에 닿았고, 침통의 차가운 대나무 끝이 허리에 닿았다. 그는 관 안을 등지고 싶지 않았고, 산길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두 눈으로 둘 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다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진소백은 오래 기다렸다. 산 아래 잡목은 어두워져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마른 잎을 흔들었다. 그 소리들 속에서 사람의 기척을 가려낼 귀는 그에게 없었다. 무인이라면 숨결 하나로 적을 안다지만, 그는 맥을 짚는 손만 배웠다. 보이지 않는 살의를 재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금 떠나면 이 관을 다시 열 수 있을까. 산길의 지워진 발자국, 빈 비석, 시신 없는 관.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쳤다면, 밤이 지나고 다시 왔을 때 이곳은 지금과 같지 않을지도 몰랐다. 강호에서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고, 비밀은 칼보다 먼저 움직인다 했다. 이름 없는 무덤 하나쯤은 하룻밤 사이에 산사태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진소백은 이를 악물었다.

종이를 들어 올렸다. 먼지에 붙은 부분이 바스러질 듯 저항하다가, 포 끝의 받침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관 바닥에는 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나무 결만 이어져 있었다. 사람 하나를 눕히기에는 충분하고, 말 하나를 숨기기에는 지나치게 깊은 빈자리였다.

그는 종이를 손바닥 위에 얹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저려 휘청였고, 발밑 흙이 무너졌다. 관 뚜껑 위에는 부러진 검과 백옥 비녀가 서로 닿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하나는 오래 꺾인 쇠였고, 하나는 흰빛을 잃어 가는 옥이었다.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종이만이 말을 품고 있었다.

진소백은 비석 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빈 앞면 아래, 옆면과 바닥에 남은 알 수 없는 획들이 어둠 속에서 더 깊어 보였다. 그는 낮에 보았던 이름들을 떠올렸다. 스물셋. 그중 하나가 많다던 말. 眞少白이라는 세 글자. 已처럼 굽은 표식. 낙양이라는 지명.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 이 접힌 종이 하나가 그 떨어진 것들 사이에 가느다란 실을 걸려는 듯했다.

그는 서둘러 펼치지 않았다.

접힘을 잘못 풀면 종이가 찢어진다. 상처도 마찬가지다. 급히 벌리면 피가 더 난다. 진소백은 포를 손가락 사이에 고쳐 감고, 약방에서 고진명의 처방전을 펼치던 방식으로 첫 귀퉁이를 받쳤다.

산 아래에서는 더 이상 돌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해는 거의 사라졌고, 관 속은 검게 잠겼다. 부러진 검은 어둠에 먹혀 쇠빛을 잃었고, 백옥 비녀만이 마지막 빛을 가늘게 붙잡고 있었다. 진소백은 숨을 고르고 종이 겉면의 검은 획을 내려다보았다.

접힌 자리 너머로 먹이 번져 있었다.

고진명이 약봉지를 접던 모양 그대로, 낡은 종이는 그의 손끝에서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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